추천 키워드 키워드 기준 i금일 기준 많이 본
뉴스 기사의 키워드 수집

한국 스포츠 뿌리를 찾아서⑧-야구인이 중심이 된 조선체육회 창립

작성일: 2018.10.31 11:59 신명철 편집 위원 기자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 1920년 7월 창립한 조선체육회는 첫 사업으로 그해 11월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오늘날 전국체육대회 기산점이 되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 개회식으로 추정되는 사진에서 애국지사 이상재 선생이 시구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19년 역사적인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서울)를 앞두고 익산시를 비롯한 전라북도 일원에서 열린 제99회 전국체전이 지난 18일 막을 내렸다. 1920년 7월 창립한 조선체육회(오늘날 대한체육회)는 그해 가을 전국체전의 기산점이 되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해 100여 년 뒤 후손들이 프로 야구와 축구 월드컵에 열광하고 조기 축구와 직장 야구, 3-3 농구, 주말 골프를 즐기는 스포츠 환경의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 스포츠 ‘선사 시대’에 선각자들은 이 땅에 스포츠를 도입하기 위해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활동을 했을까. <편집자 주>

일본은 1910년 한일병탄 이듬해인 1911년 7월 일본체육협회를 창립했다.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뤄 조선보다 일찍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체육회 발전도 조선보다 앞섰고 체육 보급의 바탕이 되는 근대 학교의 설립도 조선보다 10여 년 빠른 1886년 시작했다.

일제는 1919년 한반도에 3.1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열흘 전인 2월 18일 서울에 있는 일본 체육인들로 조선체육협회를 창설했다. 조선체육협회는 당시 조선총독부 공인 민간 체육 단체가 됐다. 조선체육협회는 한반도 전체의 종합 체육 대회인 조선신궁대회를 주관하게 되고 뒷날 일본의 전국체전이 되는 메이지신궁대회에 조선 대표를 내보내는 선발 기구 구실을 하게 된다.

이 같은 일본 체육계의 움직임은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 체육계에 영향을 미치게 됐고 근대화의 물결을 앞서 경험한 도쿄 유학생들이 조선체육회 창립의 중심에 서게 된다.

3·1운동 후 도쿄에서 유학생 만세 운동에 가담했던 이중국이 서울로 돌아왔다. 이중국은 일본 게이오대학 예과에 재학하던 1917년 도쿄 유학생 야구단(반도 팀)의 총무로 고국을 방문한 적도 있고 대학 시절 육상부와 야구부의 활동을 관심 깊게 지켜보면서 고국의 체육 진흥 운동에 뜻을 둔 인물이었다.

이중국은 보성중학교 1년 때 함께 지냈던 이원용을 만나 조국의 체육 총괄 기구의 창설을 의논했다. 이원용은 1917년 도쿄 유학생 야구단이 고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YMCA 야구 팀 1루수를 맡았던 명 선수였다.

당시 도쿄 유학생 출신 체육인들은 구리개(오늘날 서울 을지로 2가)에 있는 유문상의 집에서 자주 모였고 오성학교와 서울YMCA 출신의 국내 야구인들은 주로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이원용이 경영하던 광신양화점에 모였다.

이 두 그룹은 뒤에 이중국과 이원용의 뜻에 찬동해 조선체육회 창립 운동에 힘을 모으게 된다. 이중국과 이원용이 주동이 돼 추진하던 조선체육회 창립 운동에 변봉현이 큰 힘을 보태게 된다. 변봉현은 와세다대학 시절 야구부의 2군 선수로 활약했고 도쿄 유학생 야구단의 한 사람으로 고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야구인이다.

1918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변봉현은 고향인 평안북도 박천에서 쉬고 있다가 1919년 7월 서울로 올라와 이중국 이원용을 만나 조선체육회 창립에 주동적 구실을 하기로 합의한다.

이중국 이원용 변봉현의 3자가 합의한 조선체육회 창립에 주오대학 출신의 김병대, 와세다대학 시절 고국 방문 도쿄 유학생 야구단 인솔자였고 대한흥학회 운동부장이었던 윤기현, 유문상, 메이지대학 출신의 열렬한 야구 팬 이상기, 도쿄 성학원 신학교 출신인 이동식, 고베고등상업 출신으로 조선은행에 근무하던 임극순, 서울YMCA 출신으로 상하이에 한동안 가 있었던 현홍운, 서울YMCA 출신의 야구인 홍준기 등이 차례로 동의해 조선체육회 창립을 실현할 적당한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원용이 경영하던 광신양화점과 유문상의 자택 사랑채는 발기인 총회를 위한 준비 사무실과 같았다.

당시 신문에 따르면 조선체육회 창립을 앞두고 체육인들이 모임을 가졌을 때 애초에는 짧은 기간이나마 고려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인천에 가서 야구 경기를 갖기도 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고려구락부가 참된 한반도 전체의 체육 통합체로서 조선체육회 창립에 나섰다는 것이다.

1920년 6월 16일 저녁 서울 인사동 명월관 지점인 별유천지에서 조선체육회 발기를 위한 준비 모임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장두현 고원훈 이동식 윤기현 이원용 변봉현 이중국 김규면 원달호 김병대 김동철 등 50여명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창립 준비 위원으로 윤기현 변봉현 원달호 이동식 김병대 이중국 유문상 이원용 김동철 김규면 등 10명을 뽑아 모든 준비 절차를 위임했으며 위원장으로는 최연장자인 윤기현을 선임했다.

준비위원회는 발기인 선정에 착수했다. 발기인 선정 기준은 학교 교장이나 학교를 대표할 만한 인물, 사회 유지로서 친일적인 색채가 없는 인물 그리고 체육인들을 대상 삼아 전국적으로 인물을 찾아보았다.

이렇게 선정한 96명의 발기인 가운데 사회 유지의 태반은 당시 동아일보 주필이었던 설산 장덕수가 천거했다. 조선체육회 발기인 가운데 민족 지도자급 인사가 적지 않게 끼어 있는 것은 장덕수가 그들을 설득해 발기인에 참여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1920년 7월 13일 오후 8시 인사동 중앙예배당에서 지방 발기인 20여 명이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70여 명의 발기인이 모여 조선체육회 창립총회를 가졌다. 창립총회에서는 먼저 발기인 총회를 가져 고원훈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되고 발기인을 대표해 장덕수가 자신이 쓴 창립 취지서를 읽었다. <계속>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