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키워드 키워드 기준 i금일 기준 많이 본
뉴스 기사의 키워드 수집

차범근부터 전세진까지, 변함없이 축구 팬들에게 기쁨 주는 청소년 대표 팀(상)

작성일: 2018.11.06 12:43 신명철 기자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 2018년 AFC U 19 챔피언십 사우디아라비아와 결승전에서 만회 골을 터뜨린 조영욱(오른쪽), 하지만 결과는 뒤집지 못했다. ⓒ연합뉴스/EPA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스포티비뉴스 이종현 기자는 5일 자 <'월드컵 티켓-준우승' 정정용호~> 제하 기사에서 한국이 지난 4일 자카르타에서 열린 2018년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1-2로 졌지만 질타보다 박수를 받을 만하다고 대표 팀 선전을 평가했다.

청소년 대표 팀은 그동안 한두 명이라도 될성부른 떡잎이 있으면 역대 최강이니 황금 세대니 같은 수식어가 붙곤 했다. 그런데 이번 대표 팀에는 부정적인 표현 일색이었다.

이강인 정우영 등 주요 선수 몇이 대표 팀에 합류하지 못했고 조 편성도 호주 요르단 등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이른바 ‘골짜기 세대’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내년 폴란드에서 열리는 FIFA(국제축구연맹) U 20 월드컵 본선 티켓을 얻는 4강만 하자는 게 ‘소박한 목표’였다.

그런데 한국은 이 목표를 넘어섰고 전세진(수원 삼성)이 5골로 득점 공동 2위, 조영욱(FC 서울)이 4골로 득점 3위에 오르는 성과를 함께 올렸다.

한국은 압도적인 대회 통산 우승 횟수(12)에 이어 준우승도 5차례로 통산 2위(1위 일본 6차례)를 지켰다. 통산 우승 횟수는 한국에 이어 2위 미얀마(옛 버마, 7회) 3위 이스라엘(6회) 4위 이라크(5회) 5위 이란(4회) 6위 북한(3회) 7위 사우디아라비아 8위 태국(이상 2회) 9위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시리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연합 인도(이상 1회) 순이다.

이스라엘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안게임 출전 등 모든 스포츠 활동을 아시아 지역에서 했는데 1980년대 초 AGF(아시아경기연맹)이 해체되고 쿠웨이트가 주도한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가 조직되면서 서아시아 나라들에 밀려난 뒤 EOC(유럽올림픽위원회) UEFA(유럽축구연맹) 등에 가입했고 이후 활동 무대를 유럽으로 완전히 옮겼다.

아시아 지역 청소년 축구 절대 강자답게 한국은 아시아청소년(20세 이하)축구선수권대회 시절 이후 AFC U 19 챔피언십에 이르기까지 많은 스타플레이어를 배출했다. 연대 별로 이 대회 관련 일화와 우수 선수를 살펴본다.

[1950년대] 제1회 대회는 1959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당시 말레이시아 수상이자 AFC 회장이었던 압둘 라만의 제창으로 만들어졌다. 라만 수상은 이 대회에 앞서 1957년에는 친선 대회인 메르데카배대회를 창설하는 등 아시아 지역 축구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54년 출범한 AFC 본부가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한국은 조윤옥 이영근 차경복 김정석 김삼락 등의 활약으로 결승 리그에서 일본을 3-2, 홍콩을 1-0, 말레이시아를 2-1로 물리치고 초대 챔피언이 됐다. 제2회 대회도 말레이시아가 개최했는데 한국은 결승에서 말레이시아를 4-0으로 누르고 연속 우승했다. 1960년대 ‘아시아의 황금 다리’ 최정민과 함께 국가 대표 공격수로 활약하게 되는 조윤옥은 이 대회에서 7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1960년대] 1966년과 1970년 방콕 아시아게임[한국과 공동 1위)에서 우승하는 등 한때 아시아의 축구 강호로 군림했던 버마는 그 무렵 청소년 축구도 강해 1960년대에만 1963년 대회(말레이시아)에서 한국과 공동 우승한 것을 포함해 6차례나 정상에 올랐다. 한국은 대회 창설 이후 10여년 만인 1968년 제10회 대회를 유치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대회를 치렀다.

FIFA(국제축구연맹) 순회 코치로 활동하며 한국 축구와 인연을 맺은 데트마르 크라머가 이 대회를 앞두고 원 포인트 레슨을 하는 등 대한축구협회는 1966년 방콕 아시안게임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등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버마와 1-1로 비긴 뒤 추첨에서 져 3위 결정전으로 밀려났고 이스라엘과 0-0으로 비겨 공동 3위를 기록했다. 대회를 앞두고 열린 대표자 회의에서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한국 대표가 무승부일 경우 재경기를 하느냐, 추첨을 하느냐 하는 꽤 중요한 내용을 놓고 논의가 벌어졌을 때 추첨 방식에 ‘예스’를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홈인 한국으로서는 추첨보다는 재경기가 좀 더 이길 확률이 높았을 텐데.

게다가 대회 진행 과정에서 경리 부정 사건이 터져 온갖 잡음이 일었고 대한축구협회 집행부가 총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1970년대] 한마디로 차범근의 등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차범근은 서울 경신고에 다니던 1971년 청소년 대표로 뽑혀 그해 일본에서 열린 제13회 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결승전에서 이스라엘에 0-1로 져 준우승했다. 차범근은 고려대 1학년 때인 1972년 제14회 대회(태국)에 출전했으나 또다시 이스라엘에 0-1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그러나 청소년 수준을 넘어서는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던 차범근은 이 대회 직후 곧바로 국가대표 팀에 선발돼 그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아시안컵)에 이세연 김호 이회택 등 선배들과 함께 출전했다. 1953년 생인 차범근이 딱 19살 때였다.

차범근은 이 대회 크메르(오늘날 캄보디아)전에서 4-1로 이길 때 박수덕 이회택에 이어 3번째 골을 넣어 A매치 첫 골을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6회 메르데카배대회 결승에서는 하프라인부터 단독 질주해 2-1로 우승을 확정하는 결승 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1978년 방글라데시 대회 결승전에서 이라크와 1-1로 비겨 공동 우승했다. 단독 우승을 포함해 통산 4번째 우승이었다. 그런데 이 대회는 결승전보다 준결승전이 축구 올드 팬들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때만 해도 사생 결단 분위기였던 남북 경기였기 때문이다. 전·후반과 연장전까지 득점 없이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승부차기도 팽팽했다. 5-5. 한국은 이태호가 6번째 키키로 나서 성공했고 골키퍼 박영수는 북한 6번째 키커 슛을 막아 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박영수는 '국민적 영웅'이 됐다. 이 대회 우승 멤버 가운데 베트남 축구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박항서가 있다.

1970년대는 이란 축구가 아시아 무대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시기이다. 자국에서 열린 1974년 아시안게임에서 대회 출전 사상 처음으로 우승한 이란은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는 1973년 자국에서 열린 대회부터 1976년 태국 대회까지 4연속 정상에 올랐다. 2018년 현재 대회 최장 연속 우승 기록이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