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키워드 키워드 기준 i금일 기준 많이 본
뉴스 기사의 키워드 수집

여자 농구 명문 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을 기억하십니까

작성일: 2018.11.30 11:47 신명철 기자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선수단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서울 시민 환영식에 참석했다. 대회 MVP로 뽑힌 박신자(맨 오른쪽) 등 국가 대표 팀 주력이 상업은행 선수들이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올 시즌에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우리은행이 개막 후 파죽의 8연승을 기록했다.

우리은행은 29일 청주체육관에서 열린 2018~19 여자 프로 농구 정규 시즌 원정 경기에서 KB를 61-56으로 물리쳤다. 

종목을 막론하고 결코 쉽지 않은 프로 리그 7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우리은행은 올 시즌 정상을 겨룰 것으로 예상된 KB와 홈경기에서 59-57로 이긴데 이어 원정 경기에서도 승리하면서 우승 고지를 향해 거침없는 행진을 이어 갔다. 

우리은행이 얼마나 위력적인 경기를 펼치고 있는지는 8연승 기간 기록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우리은행은 8경기 가운데 6경기에서 10점 이상 차 승리를 거뒀고 이 가운데 절반인 3경기에서는 20점 이상 차 승리를 거뒀다. 

우리은행은 8경기에서 550득점-427실점을 기록했다. 경기당 68.75득점-53.38실점이다. 상대 득점을 40점대에 묶은 게 3경기이고 50점대가 2경기, 나머지 3경기는 딱 60점에 상대 공격을 막았다. 

공격력은 둘째 치고 몇몇 상대를 중학교 경기 수준 득점으로 누르는 수비력으로 리그를 장악하고 있다. 공격력은 기복이 있지만 수비력은 상대적으로 기복이 덜하다는 점에서 우리은행의 강세가 더욱 도드라진다. 

시즌 뚜껑이 열리기 전에는 우리은행이 올 시즌만큼은 쉽지 않은 레이스를 펼칠 것이라는 예상이 적지 않았다. 백업 요원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신인과 외국인 드래프트에서 후순위로 계속 밀리면서 우수 선수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 시즌에는 국가 대표 팀에 4명의 선수가 뽑혀 나가 팀 훈련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었다. 아무리 강한 전력을 갖고 있어도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앓는 소리를 하는데 올 시즌을 앞둔 우리은행 위성우 감독의 걱정은 말로만 하는 걱정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즌이 열리고 보니 ‘우리은행은 역시 우리은행이었다.’ 앞선 스코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은행이 접전을 벌인 경기는 59-57로 이긴 지난 16일 KB전뿐이다. 

시즌 초반이어서 매우 이른 감이 있지만 우리은행이 V7 고지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예상이 벌써부터 나올 만한 우리은행의 쾌속 항진이다. 

여자 프로 농구의 강자인 우리은행의 뿌리는 상업은행이다. 한빛은행→우리은행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기억의 저편으로 멀어져 가고 있는 상업은행은 박신자로 대표되는 여자 농구의 명문이었다. 중·장년 스포츠 팬들에게는 그 이름만으로도 정겹다. 

1899년 설립된 한국 최고(最古)의 은행인 상업은행은 IMF 외환 위기 여파로 한일은행과 합병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1960~70년대 여자 농구뿐만 아니라 축구와 야구 등 여러 운동부를 운용하면서 한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대표적인 금융 기관이었다. 

상업은행 여자 농구 팀은 세계로 나아가는 한국 농구의 상징이었다. 1960년대 여자 농구는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조흥은행 등 금융단 전성기였다. 그 무렵 한국 스포츠는 금융단이 이끌고 있었다. 

상업은행은 여자 농구뿐만 아니라 금융단 축구도 앞장섰다. 상업은행은 1969년 김호와 김호곤 등으로 축구 팀을 창단했고 뒤를 이어 주택은행 국민은행 등 한국은행을 제외한 12개 은행이 축구 팀을 만들었다. 금융단 축구에는 보험사인 한국자동차보험까지 끼어 들어 1970년대 한국축구 발전의 터전이 됐다. 

여자 농구의 경우 국내 리그는 물론이고 대만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단일팀이 출전하는 박정희장군배동남아대회가 요즘의 프로 야구를 앞지를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1963년 제1회 대회를 비롯해 상업은행은 이 대회의 단골 우승 팀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박찬숙의 태평양화학 등 비 금융권 팀들이 속속 창단하면서 상업은행 등 금융단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여자 농구=상업은행’이라는 등식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농구 팬들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상업은행=박신자’는 한국 여자 농구의 또 다른 등식이었다. 숙명여중•고를 졸업하고 1959년 상업은행에 입단한 박신자는 전정희 박경애 등을 주축으로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여자 농구 최강으로 군림하던 한국은행의 아성을 단숨에 깨뜨렸다.

그때 한국은행과 상업은행이 박신자를 놓고 벌인 스카우트 경쟁은 1970년대 초 축구 차범근, 1990년대 초 농구 서장훈을 놓고 고려대와 연세대가 벌인 영입 싸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박신자는 국내 여자 농구를 평정한 뒤 상업은행 동료 김추자 신항대 등과 힘을 모아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소련에 이어 준우승하는 쾌거를 이뤘다. 박신자는 한국이 준우승했지만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혀 세계적으로 기량을 인정받았다. 

박신자 나정선 신항대 등으로 짜인 상업은행 단일팀은 이에 앞서 1964년 페루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출전 13개국 가운데 8위를 차지해 한국 여자 농구를 세계에 알렸다. 

상업은행 팀은 대회를 마친 뒤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에서 친선경기를 가지며 한국전쟁으로만 알려져 있던 ‘꼬레아’의 이미지를 새롭게 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수준이던 때 일이다. 

이런 상업은행 여자 농구가 21세기 들어 우리은행으로 다시 태어나 국내 여자 프로 농구 강자로 위용을 떨치고 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