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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의 야구여행] 36년 만에 고교야구로 돌아온 ‘153SV 레전드’의 약속

작성일: 2022.02.23 05:30 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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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의 구원왕' 제주고 조규제 코치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제주, 이재국 기자
▲ '전설의 구원왕' 제주고 조규제 코치가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제주, 이재국 기자

#1. 약속

“혹시 나중에 삼성에서 코치 그만두시면 꼭 제주고로 모시고 싶습니다.”

삼성 코치 시절 마음이 맞았던 후배 박재현(49) 코치가 지난해 제주고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말이라도 고맙네. 내가 만약 아마추어로 간다면 제일 먼저 제주고로 갈게.”

조규제(55) 코치는 그 자리에서 약속했다.

반은 농담이었고, 반은 진심. 그땐 서로가 그랬다.

그런데 지난해를 끝으로 조 코치는 삼성에서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박 감독이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전화했다.

“제주고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 코치는 대답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선수 시절부터 코치 시절까지 지겹도록 이어진 떠돌이 생활. 이제는 서울에 사는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되는가했으나 역마살이 있는지 운명처럼 제주도로 떠나야만 했다.

약속의 무게. 가벼이 볼 수 없었다. 조 코치는 아내에게 “후배와 약속을 지키고 싶다”고 설득했다. 그 사이 몇몇 고교와 대학에서 영입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한 고교에서는 감독 자리까지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후배를 밀어내고 들어가는 모양새라 거절했다. 신의로 살아온 세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사람을 잃는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짐을 싸서 제주도로 날아왔다.

▲ 제주고 박재현 감독 ⓒ제주, 이재국 기자
▲ 제주고 박재현 감독 ⓒ제주, 이재국 기자

#2. 추억

프로필 상으로는 키 173㎝. 실제 키는 170㎝. 조규제를 떠올리면 작은 체격부터 생각난다. 그러나 그 작은 키로 야무지게 야구를 했다. 140㎞ 중후반의 강속구와 송곳피칭으로 타자들을 압도해 나갔다.

군산상고 시절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 했고, 연세대 시절 국가대표로 발탁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프로 무대에서도 존재감은 빛났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하자마자 9승7패27세이브를 기록하며 곧바로 구원왕과 신인왕에 올랐다.

고교 시절부터 일찍 두각을 나타냈고, 작은 체격에 많은 공을 던지다 보니 수시로 팔꿈치가 고장나기도 했다. 고질적 목디스크에 시달리면서 가진 재능을 모두 꽃피우진 못했다.

쌍방울 시절엔 7시즌 중 5시즌을 20세이브 이상 기록하며 ‘돌격대 수호신’, ‘전주특급’으로 맹활약했지만, 모그룹이 재정난에 빠지면서 1998년 시즌 도중 돈 많은 집 현대로 팔려가는 운명을 겪었다.

현대(1998~2000년)-SK(2001~2002년)-현대(2003년)-KIA(2004~2005년)로 이적하는 떠돌이 생활. KBO리그에서 15년간 개인통산 508경기에서 153세이브(54승 64패 8홀드 포함), 평균자책점 3.07의 기록을 남겼다.

▲ 제주고 조규제 코치가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자 선수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조 코치 오른쪽은 KIA 김선빈의 동생인 김선현 코치 ⓒ제주, 이재국 기자
▲ 제주고 조규제 코치가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자 선수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조 코치 오른쪽은 KIA 김선빈의 동생인 김선현 코치 ⓒ제주, 이재국 기자

#3. 초심

은퇴 후 2006년부터 현대(2006~2007년)-히어로즈(2008~2010년)-KIA(2011~2013년)-LG(2014년)-삼성(2016~2021년) 코치를 맡았다. 선수 시절부터 코치 시절까지 프로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30년을 달려왔다.

그랬던 그가 고교야구 무대로 돌아왔으니 모두들 놀랄 만하다. 군산상고 3학년 때가 1986년이었다. 연세대 87학번. 36년 만에 돌아온 고교야구다.

그것도 야구의 불모지로 꼽히는 제주도. 후배를 감독으로 모셔야하는 코치 자리. 어쩌면 뻔한 전력에 뻔한 박봉. 혼자 자취를 해야 하는 환경.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빛이 나지도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

“그동안 야구로 이만큼 잘 살아왔으니 이젠 어린 선수들에게 내가 받았던 혜택을 돌려줘야죠.”

박 감독은 “코치님 같은 인품을 갖춘 분도 만나기 쉽지 않다”면서 “삼성 코치 시절 항상 일정한 시간에 선수단 식당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고, 일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드셨다. 코치의 루틴이 이렇게 일정하니 선수들이 깜짝 놀라 보고 배운다. 이런 철저한 자기관리가 있었기 때문에 선수 시절에도 작은 체격에 그런 대단한 기록을 세우지 않았겠느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조 코치는 민망한지 “박 감독이 실업자 될 사람 한 명 구제해줬다”며 웃는다.

▲ 조규제 코치가 제주 생활과 제주고 선수들의 애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제주, 이재국 기자
▲ 조규제 코치가 제주 생활과 제주고 선수들의 애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제주, 이재국 기자

#4. 열정

“코치님, 첫사랑 말씀해주세요~.”

한 투수가 짓궂게 질문을 하자 모두들 폭소를 터뜨린다.

조 코치가 제주고에 온 지는 채 두 달이 되지 않았다. 그 사이 선수들과도 부쩍 가까워졌다.

“여기 와서 말이 많이 늘었어요. 프로 선수에게는 짧게 설명할 것도 아이들 눈높이에서 최대한 쉽게 풀어서 설명해야하니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죠. 대화를 하기 위해 평소 관심도 없던 가수 이름도 외우고, 그들만의 비속어나 유행어도 배우고 있어요.”

조 코치는 “어느 순간 나도 애들하고 노는 것이 좋아진 것 같다”며 웃었다.

▲ KIA 김선빈(왼쪽)은 1월에 제주고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틈틈이 지도를 하며 조언을 건넸다. 김선빈은 방망이와 글러브, 장갑 등을 선물해주고 광주로 돌아갔다.
▲ KIA 김선빈(왼쪽)은 1월에 제주고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틈틈이 지도를 하며 조언을 건넸다. 김선빈은 방망이와 글러브, 장갑 등을 선물해주고 광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으로는 제자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제주도의 유일한 고교야구팀인데 2019년에는 해체 위기를 만나기도 했다. 여전히 열악한 환경. 주변의 도움도 절실해 보인다.

“제가 여기 와서 들었던 말 중 가장 가슴 아팠던 말이 뭔지 아세요? 선수들이 그러더라고요. ‘우리에겐 누구도 관심을 안 가져주신다’고. ‘FA 계약한 선배님들도 항상 육지에 있는 학교에만 기부를 한다’고.”

그 말을 들은 조 코치는 곧바로 NC 심창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삼성 시절 가까웠던 제자였다.

“창민아, 쓰던 글러브나 장갑 있으면 몇 개 보내줄 수 있겠니?”

심창민은 조 코치의 말을 들은 뒤 곧바로 “예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여기 선수 중에서도 심창민 선수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선수가 있거든요. 심창민이 쓰던 헌 글러브를 받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우리 KBO리그 선수들이 제주고에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어요. 선물도 선물이지만 이곳 선수들은 관심이 더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점차 뿌듯한 일이 자주 생기고 있다. KIA 김선빈이 1월에 제주고로 와서 함께 훈련했다. 화순고와 동국대에서 야구를 한 동생 김선현이 제주고 야수코치로 있고, 처가가 제주여서 자연스럽게 합동훈련이 성사됐다. KIA 후배 김태진도 함께 데려와 훈련하면서 틈틈이 제주고 선수들을 지도도 하고 조언도 건넸다. 그리고는 배트와 장갑, 글러브를 나눠주고 광주로 돌아갔다.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인 스포티비뉴스 이재국 기자가 제주고 박재현 감독(왼쪽에서 세 번째)에게 야구공(공인구)을 전달하자 선수들이 모자를 하늘로 던지며 환호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조규제 코치다.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인 스포티비뉴스 이재국 기자가 제주고 박재현 감독(왼쪽에서 세 번째)에게 야구공(공인구)을 전달하자 선수들이 모자를 하늘로 던지며 환호하고 있다. 맨 오른쪽이 조규제 코치다.

이만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의 도움으로 메이저리그식 마운드 흙이 깔렸고,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은 지인의 후원을 이끌어내 방망이 100자루를 보내왔다고 한다. SPOTV도 ‘고교야구가 희망이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주고에 야구공(공인구)을 전달했다.

전설의 구원왕 조규제. 그는 지금 제주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꿈 많은 청춘들의 순수 열정을 보노라면 자신의 고교 시절 추억도 떠오른다고 했다.

"언제까지 제주도 생활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후회하려고 했으면 여기 안 왔어요. 아이들과 재미있게 야구를 하고 있는데, 벌써 정이 들었어요. 이 친구들도 다 새끼인데 이제 이 친구들을 두고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올 때는 내 맘대로 왔지만 갈 때는 내 맘대로 못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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