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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④ “죽었다던 손 군(손기정)이 살아 있으니 내가 또 운다”-김구

작성일: 2016.07.09 07:0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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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자유 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제 26회 전국체육대회) 개회식에서 태극기를 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른쪽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에서 6위에 입상한 김은배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제국주의 일본은 1936년,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1940년 여름철 올림픽을 도쿄에 유치했다. 그러나 자기들이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으로 대회를 열지 못했다. 런던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1944년 여름철 올림픽도 제 2차 세계대전 때문에 취소됐다. 그런 사이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났고 해방 이후 곧바로 맞게 된 큰일이 1948년 런던 올림픽 출전 문제였다.   

이에 앞서 1946년 8월 20일 덕수궁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10주년 기념 축하회에는 2년 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뽑히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가 함께 참석해 그들이 망명 당시 손기정의 우승 소식을 듣고 느꼈던 바를 말했다.

이승만은 “우리 민족은 일제의 탄압 아래 그저 먹고 입고 그리고 숨을 쉬고 있었다. ‘산송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역경 속에서 손기정, 남승용 두 선수가 조선의 명예를 위해 세계 무대에서 싸워 승리를 거뒀다. 우리 3천만 민족도 이 두 선수처럼 불굴의 투지를 발휘하자”고 축사를 했다. 

이어 김구는 “나는 오늘까지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때문에 세 번 울었다. 10년 전 베를린에서 망국민의 한 청년으로서 세계 열강의 젊은이들과 사투를 벌여 우승했으나 조선 사람이면서도 조선 사람 행세를 못해 신문 지상에 그대들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보면서 나는 울었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의 중경(충칭)에서는 조선 청년 손기정이 일본군에 지원해 필리핀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쌍해서 울었다. 그리고 오늘 죽었다던 손 군을 광복한 조국 땅에서 다시 보니 감격해서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이들은 김구의 이 말을 듣고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은 육상과 축구, 야구, 배구 등 중요 종목들이 각각 제 1회 대회로 활발히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민간인의 38선 통과가 금지되기 두 달 전인 1946년 3월 25일 광복 후 첫 경평축구대항전이 서울에서 열렸다.

조선체육회는 1946년 10월 16일부터 닷새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조선올림픽대회’를 열었다. 아직 전국체육대회라는 명칭이 정착되지 않았던 때인데다 2년 뒤 런던 올림픽 출전에 대한 열망이 ‘조선올림픽대회’라는 대회 이름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대회가 2019년 역사적인 제 100회 대회(서울)를 여는 전국체육대회의 제 27회 대회다. 

조선체육회는 2년 앞으로 다가온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올림픽대책위원회를 꾸렸다.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나라는 NOC(국가올림픽위원회)를 구성하고 올림픽 종목 경기단체가 5개 이상 국제경기연맹에 가맹하고 있어야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

조선체육회는 부회장인 유억겸을 올림픽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뽑고 전경무와 이상백에게 부위원장을 맡겼다. 올림픽대책위원회는 국내 경기 단체가 구성돼 있는 육상, 축구, 복싱, 역도, 농구, 사이클 등 6개 경기 단체의 정관을 영문으로 번역해 국내 아마추어 규정과 함께 각각의 국제 경기 단체에 제출해 가입하도록 이끌었다. 

1947년 6월 15일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 참석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올림픽 참가 자격을 승인 받으려고 전경무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 5월 29일 미군용기 편으로 떠났으나 항공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올림픽대책위원회는 전경무 부위원장을 대신할 인물로 미국에 있는 이원순을 지목하고 그에게 급히 전문을 보내 IOC 총회에 참석하도록 부탁했다. 미국에 30년 이상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한 이원순은 미국 시민권을 얻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여권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원순은 스스로 ‘사제 여권’을 만들어 스톡홀름으로 날아가 6월 20일자로 KOC가 IOC의 회원국으로 승인 받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탄생한 KOC의 초대 위원장은 여운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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