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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㉚ 체육 관계자들 눈총 받던 사격, 효자 효녀 종목으로 우뚝 서다

작성일: 2016.08.04 09:4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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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런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진종오 김장미와 박상순 감독(왼쪽부터) ⓒ스포티비뉴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제 30회 런던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은 역대 원정 대회 최고 순위(5위, 금 13 은 8 동 7)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했다. 사격(금 3 은 2)과 펜싱(금 2 은 1 동 3)은 기존의 효자 효녀 종목인 양궁(금 3 동 1)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빼어난 성과를 올렸다. 두 종목의 올림픽 금메달이 런던 대회에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지만 질과 양에서 올림픽 출전 사상 역대 최고여서 스포츠 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한국은 15개의 금메달이 걸린 런던 대회 사격에서 금메달 3개와 은메달 2개로 사격 강국인 미국(금 3 동 1)과 이탈리아(금 2 은 3), 중국(금 2 은 2 동3)을 제치고 종목 순위 1위를 차지했다. 떼를 쓰다시피 해 올림픽에 나섰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1970년대와 비교하면 말 그대로 상전벽해였다. 세부 종목으로는 권총, 선수로는 진종오와 김장미에 의존한 성적이었지만 소총에서도 역대 올림픽에서 나름대로 성적을 올렸기에 진정한 사격 강국이 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사격이 메달박스 종목이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1 동 1)에 이어 다시 한번 6위 이내 입상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과 선수 위주로 소수 정예 선수단을  꾸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1차적으로 확정된 선수단은 여자 배구와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등 5개 종목에 39명(임원 13명, 선수 26명)이었다. 이는 1952년 헬싱키 대회 때보다 4명이나 적은 역대 최소 규모였다. 

그러나 그해 7월 프랑스에서 열린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자유중국(대만)을 3-0, 북한을 3-1로 꺾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은 남자 배구(임원 2명, 선수 12명)가 합류한 데 이어 서독 현지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육상의 박상수(남자 높이뛰기)와 백옥자(여자 포환던지기) 그리고 수영의 조오련과 사격 대표팀(임원 1명, 선수 5명)이 추가되면서 62명(임원 6명, 선수 46명)으로 선수단 규모가 늘었다. 

사격은 입상 가능성이 높지 않았지만 대한사격연맹의 강력한 요청으로 선수단에 포함됐다. 그러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출전 선수 대부분이 30위권 밖에 머물렀다. 1956년 멜버른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한 뒤 이 대회까지 꾸준히 올림픽 메달에 도전했지만 세계 수준의 높은 벽을 실감할 뿐이었다. 게다가 이 대회에서 하계 올림픽에 처음으로 등장한 북한은 남자 소구경 복사에서 이호준이 599점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해 남북 사격 대결에서 완패했다. 당시 사격계 분위기가 어땠을지는 불문가지다.   

한국 사격은 1978년 제 42회 세계선수권대회를 71개국 1천5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태릉국제종합사격장에서 열면서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은메달 3개와 동메달 5개를 획득해 세계 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심감을 갖게 됐다.  

세계선수권대회 10년 뒤에 열린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차영철이 소구경 복사에서 은메달을 차지해 올림픽 사격 메달의 물꼬를 텄고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는 여갑순과 이은철이 여자 공기소총과 남자 소구경 복사에서 금메달 과녁을 명중했다.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는 ‘노 메달’로 주춤했으나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강초현이 여자 공기소총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4년 아테네 대회에서는 진종오가 남자 권총 50m, 이보나가 여자 더블트랩에서 각각 은메달을 차지했고 이보나는 트랩에서 동메달을 추가했다. 그리고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진종오가 권총 50m에서 금메달을 쐈고 공기 권총 10m에서 은메달을 추가했다.     

런던 대회에서는 진종오가 남자 공기권총 10m와 권총 50m에서 2관왕에 올랐고 김장미가 여자 권총 25m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최영래와 김종현은 남자 권총 50m와 남자 소총 3자세 50m에서 각각 은메달을 보탰다. 김장미의 발굴은 사격계로서는 큰 의미가 있다. 2010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 1회 하계 유스 올림픽에서 배출한 11명의 금메달리스트 가운데 사격의 김장미가 첫 번째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는 사실은 종목을 막론하고 주목할 만하다. 싱가포르 대회에서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종합 순위 3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청소년들의 우의와 친선을 도모하는 대회로 대륙별 혼성 경기 등이 있어 순위의 의미는 크게 없지만 싱가포르 대회와 2014년 난징 대회 등 유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은 한국 스포츠의 미래를 밝힐 소중한 재목들이다.           

한국은 10개의 금메달이 걸린 런던 대회 펜싱 종목에서 이탈리아(금 3 은 2 동 2)에 이어 2위(금 2 은 1 동 3)에 올랐다. 펜싱의 본고장인 유럽의 우크라이나(금 1 동 1)와 헝가리(금 1), 러시아(은 2 동 1), 독일(은 1 동 1), 노르웨이, 루마니아(이상 은 1) 등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1896년 제 1회 아테네 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으로 열린 펜싱은 100년 넘게 유럽의 독무대였다. 

아시아인이 펜싱에서 메달을 딴 건 2000년 시드니 대회 때 한국의 김영호가 플러레 남자 개인전에서 금메달, 이상기가 에페 남자 개인전에서 동메달 그리고 중국이 플러레 남자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게 처음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프랑스(금 2 은 2)와 이탈리아(금 2 동 5), 독일(금 2),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이상 금 1) 등 유럽 나라들이 금메달을 휩쓸었다. 비 유럽 나라로는 중국(금 1 은 1)과 미국(금 1 은 3 동2)만이 금메달 대열에 끼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에서는 세계 펜싱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유럽판을 깨는 데 한국이 선봉에 섰다. 여자 사브르 개인전 결승에서 김지연이 러시아의 소피아 벨리카야를 15-9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남자 사브르 단체전 결승에서는 루마니아를 45-26으로 꺾고 금메달 시상대에 올랐다. 펜싱에서 아시아 나라가 단체전에서 우승한 건 한국과 런던 대회 중국 여자 에페팀이 처음이다. 

구본길-원우영-김정환-오은석으로 짜인 사브르 대표팀이 우승한 건 비록 얇은 선수층이지만 대표 선수들의 기량이 고르다는 점을 방증하고 있어 다음 대회도 기대하게 했다. 에페 여자 단체전의 은메달도 값지다. 신아람은 개인전 준결승에서 ‘멈춰 버린 1초’에 울었지만 단체전 메달로 웃을 수 있었다. 남자 에페 개인전의 정진선, 남자 플러레 개인전의 최병철 그리고 남현희 등 여자 플러레 단체전 멤버가 동메달을 보탰다.   

한국이 선봉에 서니 다른 대륙 나라들도 힘을 냈다. 이집트는 아프리카 나라, 아랍어를 사용하는 국가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펜싱 메달리스트(남자 플러레 개인전 은메달)를 배출했다. 남자 에페 개인전에 출전한 베네수엘라의 루벤 리마르도는 남미 선수로는 처음으로 펜싱 종목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은 런던 대회에서 남자 축구(동메달) 등 12개 종목에 걸쳐 고르게 메달을 수확했다. 13개 종목에서 메달을 거둬들인 베이징 대회에 견줘 야구(금메달)가 정식 종목에서 빠졌고 역도(금 2 은 1)가 ‘노 메달’이었기에 실제적으로는 메달 종목이 늘어난 셈이다. 이런 가운데 사격과 펜싱은 새로운 효자 종목으로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양궁 여자 단체전(이성진 기보배 최현주)과 개인전(기보배) 양궁 남자 개인전 오진혁 유도 김재범(남자 81kg급)과 송대남(남자 90kg급) 기계체조 뜀틀 양학선 레슬링 김현우(그레코로만형 66kg급) 태권도 황경선(여자 67kg급) 등 금메달리스트들을 비롯한 한국 선수단 248명 모두가  해방 직후 어려운 환경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던 선배들의 올림픽 정신을 이어 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미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1948년 런던 올림픽에 나섰던 한국은 64년의 시간이 흐른 2012년, 다시 그곳 런던에서 당당한 세계 10강의 일원으로 우뚝 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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