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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도쿄 올림픽] 반세기 전, 도쿄는 어떻게 올림픽 치렀나

작성일: 2016.08.23 08:0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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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마라톤에서 2연속 우승한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맨발로 풀코스를 달려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2시간15분16초2의 그때 세계 최고 기록 또한 놀라웠다. 직전 대회인 1956년 멜버른 대회 우승 기록은 2시간25분이었다.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도쿄는 이런저런 사연 속에 1964년 제 18회 여름철 올림픽을 개최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1940년 제 12회 여름철 올림픽을 그해 9월 21일부터 10월 6일까지 도쿄에서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자기들이 조작한 사건으로 일으킨 중일전쟁으로 이 대회를 열지 못했다.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된 상태였지만 이 대회가 정상적으로 치러졌다면 한국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거둔 금메달 1개(손기정), 동메달 1개(남승룡) 이상의 성적을 거둘 수도 있었다. 

아래 기사 내용을 보면 이런 가정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1939년 제 10회 메이지신궁대회(그 무렵 일본의 전국체육대회 격) 마라톤에서 오동우가 우승해 한국 선수가 3연속 우승했고 육상 1만m에서는 유장춘이 1위로 골인했다. 축구 일반부에서는 함흥축구단이 정상에 올라 한국 축구의 위상을 드높였다. 역도는 여전히 막강했다. 이규혁(54kg급), 남수일(60kg급), 조택희(67kg급), 이영환(82kg급)이 왕좌에 올랐다. 남수일은 세계신기록으로, 이영환은 일본 신기록으로 각각 우승했다. 

1940년 제 11회 메이지신궁대회부터는 매년 개최로 바뀌지만 중국 대륙 침략이 장기전의 수렁에 빠져 있는데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년 전이었던 탓에 이른바 국방 경기가 대두돼 메이지신궁대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축구 일반부에서 함흥축구단이, 축구 중등부에서는 중동중학이 패권을 차지했다. 농구 남자 중등부에서는 평양3중이 우승했다. 역도에서는 박동욱(56kg급)과 김성집(75kg급)이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고 남수일(60kg급), 이병돈(67.5kg급), 이영환(82.5kg급)도 정상에 올랐다." 

1940년 무렵 한반도에는 여전히 우수한 마라토너들이 많이 있었고, 이때로부터 8년 뒤인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에서 동메달을 따게 되는 김성집은 선수 생활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남수일과 박동욱은 김성집과 함께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역사(力士)들이었다. 

올림픽 메달 가능성과 대표팀 선발 여부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축구도 그 무렵 우수 선수들이 많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축구 대표팀에는 유일한 한국인으로 김용식이 있었다. 한국인 선수 선발에 인색했던 일본이지만 김용식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식은 일본이 3-2로 이긴 스웨덴과 치른 1회전과 0-8로 진 이탈리아와 8강전에 모두 뛰었다.  

베를린 올림픽에 이어 일본이 1938년 제 3회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 대비해 1936년 11월 소집한 국가 대표팀 명단에는 김용식을 비롯해 이유형, 배종호, 박규정 등 4명의 한국인 선수가 포함됐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 12조에 속한 일본이 기권하지 않았으면 한국과 월드컵의 인연은 보다 일찍 맺어졌을 것이다.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연인원 40여 명의 한국인 선수가 각종 국제 대회에 대비한 일본 축구 대표팀 훈련에 소집됐다. 그 무렵 한국 축구 선수들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방증이다. 

일본은 1940년 올림픽을 유치하기 전에 1910~30년대에 열린 극동아시아경기대회(Far Estern Championship Games, 아시아경기대회의 전신 격)의 1917년 제 3회, 1930년 제 9회 대회(이상 도쿄)와 1923년 제 6회 대회(오사카)를 열며 국제종합경기대회 개최의 기본을 쌓았고, 1958년 제 3회 아시아경기대회를 도쿄에서 주최해 올림픽 개최의 기반을 닦았다.  

이 대회 주 경기장이 일본 스포츠의 심장으로 불렸던 국립경기장이다. 한국으로서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2-1 역전승을 거둔 기분 좋은 곳이다. 이 경기장이 6년 뒤인 1964년 도쿄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으로 사용됐다.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뒤 열린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전범국(戰犯國)이었기 때문이다. 1952년 헬싱키 대회부터 올림픽 무대에 복귀한 일본은 1960년 제 17회 여름철 올림픽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다. 전범국으로 올림픽 출전을 금지당한 일본이 12년 만에 올림픽을 열겠다고 나선 것이다. 1955년 6월 15일 파리에서 열린 제 50차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도쿄는 7개 후보 도시 가운데  4표를 얻어 1차 투표에서 꼴찌로 탈락했다. 3차 투표에서 로마가 로잔을 35-24로 누르고 1960년 여름철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재수에 나선 도쿄는 1959년 5월 26일 뮌헨에서 열린 제 55차 IOC 총회에서 34표를 받아 디트로이트(10표) 빈(9표) 브루셀(5표)를 1차 투표에서 제치고 1964년 여름철 올림픽을 유치했다.

도쿄 올림픽은 1964년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93개국 5,151명(남 4,473명 여 678)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출전 선수들은 19개 종목, 163개 세부 종목에서 기량을 겨뤘다. 유럽과 미국이 독점해 온 올림픽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대회였다. 또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딛고 부흥하는 일본을 돋보이게 한 대회였으며 주 경기장인 도쿄 국립경기장은 대회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도쿄와 일본 정부는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 대회를 준비하는 데 들인 직간접 비용이 5억6천만 달러에 이르렀다.

이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가 1960년 로마 대회에 이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마라톤에서 2연속 우승한 것이다. 아베베 비킬라는 경기 5주일 전 충수염 수술을 받았지만 2시간12분11초2의 당시 세계 최고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수영에서는 돈 숄랜더(미국)가 남자 ㅍ자유형 100m 등 4관왕에 올랐고 호주의 돈 프레이저는 여자 자유형 100m에서 3연속 우승하며 대회를 빛냈다. 뒷날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되는 미국의 조 프레이저는 손 부상에도 복싱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미국은 1936년 베를린 대회 이후 6연속 우승에 성공한 농구 등 금메달 36개와 은메달 26개, 동메달 28개로 라이벌 소련(금 30, 은 31, 동 35)을 제치고 종합 1위를 차지했고 개최국 일본은 홈의 이점을 최대한 살리며 체조, 유도, 여자 배구, 레슬링, 복싱 등에서 고르게 메달을 획득해 종합 3위(금 16, 은 5, 동 8)에 올랐다. 일본의 뒤를 독일(금 10, 은 22, 동 18), 이탈리아(금 10, 은 10, 동 7), 헝가리(금 10, 은 7, 동 5) 등이 이었다. 이때 독일은 동∙서독 단일팀이었다. 

북한은 결과적으로 대회를 보이콧했지만 한국과 북한이 독자적으로 출전한 것과 달리 동독과 서독은 1955년 6월 IOC의 중재로 단일팀을 구성하는 데 합의한 뒤 1956년 코르티나 담페초(이탈리아) 겨울철 올림픽, 1956년 멜버른 여름철 올림픽, 1960년 로마 여름철 올림픽 그리고 이 대회까지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단일팀의 국호는 독일, 단기는 흑∙적∙황 3색으로 디자인 된 독일기에 오륜 마크를  달았으며 국가는 베토벤의 제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였다. 

도쿄 대회 이후 독일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처럼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리고 1990년 통일 이후 1992년 알베르빌 겨울철 대회와 바르셀로나 여름철 대회부터 단일팀보다 한 발 더 나아간 ‘통일 독일’(United Germany)로 출전하게 된다. 통일 독일의 올림픽 출전은 1936년 베를린 여름철 올림픽 이후 56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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