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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뿌리를 찾아서⑤-외국인 선교사·교사, 스포츠 소개와 도입 주도

작성일: 2018.10.26 09:55 신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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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께 한성고교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야구 경기에 나선 ‘기청’ 포수 허성(왼쪽)과 한성고교 타자 이영복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2019년 역사적인 제100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서울)를 앞두고 익산시를 비롯한 전라북도 일원에서 열린 제99회 전국체전이 지난 18일 막을 내렸다. 1920년 7월 창립한 조선체육회(오늘날 대한체육회)는 그해 가을 전국체전의 기산점이 되는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개최해 100여년 뒤 후손들이 프로 야구와 축구 월드컵에 열광하고 조기 축구와 직장 야구, 3-3 농구, 주말 골프를 즐기는 스포츠 환경의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 스포츠 ‘선사 시대’에 선각자들은 이 땅에 스포츠를 도입하기 위해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활동을 했을까. <편집자 주> 

한일 병탄안을 놓고 온 겨레가 나라를 빼앗길 치욕에 분노해서 의거를 일으킬까 경계하고 있던 일제는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연합 운동회를 근본적으로 없애려 했으나 한성 시내의 관·공립이 아닌 사립 중등 정도의 학교들은 비용은 각 학교가 분담해서 개최할 테니 당국은 간섭하지 말라고 반발했다. 

한성 시내 오성학교, 보성학교, 청년학관, 배재학당, 경신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양정학교 등 8개교는 1910년 5월 14일 동소문 밖 삼선평에서 각 학교 직원 및 학생 1,4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 운동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해마다 열기로 돼 있었으나 뜻하지 않은 불상사를 트집 잡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제3회 대회가 마지막 대회가 됐다.

1912년 5월 10일 청파정에서 8개교가 참가한 가운데 제3회 사립학교 연합 운동회가 열렸으나 장거리 경주에서 심판의 오심이 발단이 돼 난투극이 일어났다. 일제는 난투극을 트집 잡아 5월 31일 내무부 장관의 명령으로 연합 운동회의 개최를 금지했다. 금지령에 반발한 주최 측은 다음 해인 1913년 10월 10일 동소문 밖 삼선평에서 제4회 대회를 강행하려 했으나 일제는 이 행사를 강제 해산했다.

학교 운동회는 지방에서도 성황을 이뤘다. 1908년 4월 강화에서 열린 강화군 내 각 학교 연합 운동회에는 각 면·리의 80개가 넘는 학교에서 남녀 모두 1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했다. 

예정된 각종 경기가 모두 끝난 뒤 학생들은 양편으로 나뉘어 종이나 나무로 만든 대포 총기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모의 전투를 벌였다.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적십자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모의 전투가 끝나자 태극기를 높이 올리고 만세를 잇따라 부르며 악대가 군악을 연주하니 관람객들까지 흥이 나서 춤을 췄다.

1910년 5월 10일 평양 대성학교는 평양성 내 경산지에서 운동회를 가졌다. 300명의 학생들이 청, 홍 양군으로 나뉘어 39개 종목에 걸쳐 실력을 겨뤘다. 악대도 동원된 이 행사를 수만 명이 관람했다고 보도됐다. 당시 신문은 ‘이 운동회가 열렸을 때 특기할 만한 일은 그전에 개최됐던 예수교 중학교 운동회 때도 그랬지만 평양성 내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어 축하했다는 사실이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외국 문물과 함께 근대 스포츠가 이 땅에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외국인 선교사와 교사들이 스포츠 소개와 도입에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1896년 영국인 교사 허치슨이 지도한 영어학교 운동회는 육상경기 도입의 출발점이었고 각급 학교의 설립은 체조 보급을 촉진했다. 조선 정부도 승마, 검도, 사격 등 군인들에게 필요한 종목들 도입에 앞장섰다. 1896년 6월 10일 왕명으로 친위기병대가 창설됐고 1901년 4월 23일에는 무관학교에서 기병대 훈련을 시작했다. 1909년 6월 13일 근위기병대가 훈련원에서 기병경마대회를 열어 헌병대 이영철 참위(소위)가 우승했다.

검도에 관해서는 자세한 문헌이 드물긴 하지만 1896년 5월 13일 ‘순검(순경)들의 격검(검도) 도구 구입비’라는 항목이 고종실록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896년부터 치안 유지를 위해 시작된 경찰 검도가 우리나라 검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검도는 무술로서 군경 사이에 차츰 퍼져 나갔다. 1908년 3월 28일 비원에서 열린 한일 두 나라 경찰관 검도 경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 검도 대회로 꼽힌다.

1904년 9월 24일 설립이 공포된 육군연성(硏成)학교는 오늘날의 국방연구원에 해당하는 장교들 재교육 기관이다. 육군연성학교는 장교들에게 전술, 사격술, 체조, 검술을 가르치고 이들 과목의 원리를 연구하도록 했다. 육군연성학교의 사격 교육이 우리나라 사격의 최초로 간주되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수영은 무관학교에서 비롯됐다. 1898년 5월 14일 발표된 무관학교 칙령에 ‘더위를 맞이하면 3주일 동안 휴가를 주되 이 기간에 헤엄치는 연습을 명할 수도 있다’라고 돼 있는 것으로 봐 그해 여름 휴가 동안 무관학교 학생들이 수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무관학교는 1909년 7월 15일부터 2주일 동안 이희두 교장 이하 장교 및 군속 20여명과 학생 40여명이 한강에서 야영하면서 수영 훈련을 했다.

야구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의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서였다는 것이 종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2009년 9월 간행된 ‘서울YMCA 체육운동 100년사’에는 야구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905년이 아니라 1904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재우 박사는 “우리나라에 야구가 들어온 해가 1905년이라고 주장하는 국내 학자들은 일본인 오시마가 쓴 ‘조선야구사’를 인용하고 있다. 오시마는 한국의 야구 도입을 메이지 37년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메이지 37년을 서력(西曆)으로 환산하면 1904년이 된다. 1905년을 주장하는 국내 학자들은 아마도 메이지 37년을 서력으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1년 차이가 난 것이 아닌가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1906년 2월 11일 황성기독교청년회 팀과 독일어학교 팀이 훈련원에서 야구 경기를 치러 독일어학교 팀이 3점 차로 승리해 우리나라 야구 경기의 첫머리를 장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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