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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⑤ ‘신생 대한민국’태극기를 들고 런던 올림픽에 나서다

작성일: 2016.07.10 07:0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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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런던 올림픽 한국 선수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촌식을 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대한체육회는 1948년 상반기에 어렵사리 육상과 축구, 농구, 복싱, 역도, 레슬링, 사이클 등 7개 종목 67명의 런던 올림픽 선수단을 구성했다. 이 선수단을 구성하기까지 각 경기 단체는 자기네 종목에서 한 명이라도 더 보내려고 다른 종목을 헐뜯고 같은 종목 안에서도 서로 비방하는 등 잡음이 많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올림픽 선수단을 런던으로 보내야 하는데 8월 15일까지 통치권을 가진 미 군정청이 비용을 마련해 줘야 참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미 군정청은 선수단 인원이 많으니 10명을 줄이라고 대한체육회에 통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게 선수단을 구성한 대한체육회가 10명을 줄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때 일부 체육인들로부터 친일파라고 배척 받아 체육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이상백이 “모두 다 보낼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한체육회 간부들이 그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했다. 

이상백은 앞서 소개했듯이 일제 강점기에 일본농구협회 상무이사, 일본체육협회 전무이사를 지내고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선수단 임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선수단 총무를 맡았기 때문에 일부 체육인들은 그를 친일파라고 몰아세워 올림픽 선수단 구성에 참여하지 못하게 견제했다. 그러나 다급해진 대한체육회로서는 이상백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미 군정청은 올림픽 출전 한국 선수단에 관한 결정을 발표한다고 대한체육회에 통보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이상백이 나타나지 않자 미 군정청 관계자는 “이상백 씨는 왜 오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으면서 발표를 보류했다. 대한체육회 간부들은 이상백이 있는 동방문화연구소로 사람을 급히 보내 이상백을 발표장으로 불렀고 이상백이 참석하자 미 군정청은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의 지시로 한국의 올림픽 선수단을 모두 보내기로 했다”고 올림픽 선수단 파견에 따른 결정을 발표했다. 미 군정청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리자 그를 배척했던 사람들도 이상백의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백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 하지 중장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던 더글러스 매카서 원수를 움직였다. 존 하지 중장에게 명령할 수 있는 윗사람이 태평양 주둔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매카서 장군이었다. 더글러스 매카서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미국 선수단 단장으로 참가했고 1928년부터 2년 동안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위원장도 맡은 체육인이다. 그때 미국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이 이상백과 친한 에이버리 브런디지였다. 아마추어리즘의 신봉자로 뒷날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1952년~1972년 재임)이 되는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는 등 친한파 스포츠인으로 활동했다.     

이상백은 미국에 있는 친구 에이버리 브런디지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에이버리 브런디지는 더글러스 매카서 원수에게 연락해 존 하지 중장으로 하여금 한국 올림픽 선수단을 모두 보내도록 만든 것이다. 미 군정청은 이상백에게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단을 이끌도록 권유했으나 이상백은 거절했다. 이상백은 자신을 배척했던 인사들이 선수단 임원으로 적지 않게 끼어 있어 올림픽 선수단을 이끌기 어렵다고 판단해 런던행을 포기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상백은 다음 대회인 1952년 헬싱키 올림픽부터 스포츠 외교 무대에 나타난다.

해외여행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 체육인들은 평생의 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올림픽 참가 선수단 구성을 놓고 선수단에 들어가기 위해 혈안이 돼 큰 물의를 일으키며 어렵게 선수단을 구성했다. 이런 선수단 구성에 책임을 지고 있던 대한체육회 집행부는 선수단이 귀국하면 바로 총사퇴하기로 결정했다.

1948년 6월 21일 서울 종로에 있는 YMCA 회관에 모인 67명의 선수단은 서울역까지 행진한 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편으로 후쿠오카에 간 뒤 그곳에서 기차 편으로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배편으로 홍콩으로 갔고 홍콩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항공기를 이용해 방콕→캘커타(오늘날의 콜카타)→바그다드→아테네→로마→암스테르담을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축구 대표팀은 경유지인 홍콩에서 홍콩과 친선경기를 가져 5-1로 이겼는데 이 경기가 한국 축구사에 기록돼 있는 첫 A 매치다. 

역도 동메달리스트인 김성집(뒷날 태릉선수촌장)이 홍콩으로 가는 배 안에서도 훈련했다는 얘기는 체육계에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948년 7월 29일부터 8월 14일까지 열린 제 14회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를 온 세계에 알렸다. 이 대회에서 역도 미들급의 김성집과 복싱 플라이급의 한수안이 각각 동메달을 따는 성과를 올렸다. 큰 기대를 모았던 마라톤에서는 40km 지점에서 선두였던 최윤칠이 근육통을 일으키며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는 바람에 손기정에 이은 한국 마라톤의 올림픽 2연속 우승의 꿈이 깨지고 만다. 

한국인 첫 여성 올림피언인 육상의 박봉숙은 원반던지기에서 33.80m로 21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18위를 했다. 이 종목에 출전한 미국과 유럽 나라 선수가 아닌 유일한 선수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는 한국을 비롯해 아프가니스탄, 버마(오늘날의 미얀마), 실론(오늘날의 스리랑카),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 인도, 이란, 이라크, 레바논, 파키스탄, 필리핀, 싱가포르, 시리아 등 적지 않은 아시아 나라들이 출전했다. 193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은 독일과 함께 전범국으로 올림픽 출전이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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