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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⑨‘신금단 부녀 상봉’ 등 갖가지 사연이 많았던 도쿄 올림픽

작성일: 2016.07.14 07:0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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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도쿄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단을 환영하기 위해 하네다국제공항에 나온 재일동포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64년 도쿄 올림픽은 남북 단일팀 출전 문제와 북한 선수단의 대회 직전 보이콧 결정 그리고 '신금단 부녀 상봉' 등으로 대회 전부터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이 대회는 당시로는 최대 규모인 224명(임원 59명, 선수 165명)의 선수단이 파견되는 등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됐다.     
                      
대한체육회는 도쿄 올림픽에 대비해 1963년 2월 1일부터 대회 직전인 9월 30일까지 4단계에 걸쳐 지속적으로 강화 훈련을 펼치며 종목별로 전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일 국교 정상화를 반대하는 데모가 연일 벌어지면서 정계가 소용돌이 속에 빠지자 정부가 1964년 6월 3일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바람에 선수들의 훈련은 물론 국가 대표 선수 선발 대회까지 중단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계엄 선포 7일 뒤 체육 관련 집회는 허용됐다. 

도쿄 올림픽은 1964년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94개국 5천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출전 선수들은 19개 종목, 163개 세부 종목에서 기량을 겨뤘다. 유럽과 미국이 독점해 온 올림픽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대회였다. 도쿄는 1940년 제 12회 대회를 유치했으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대회가 취소된 전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 선수단은 올림픽 예선을 치러야 했던 농구(남자)를 비롯해 사격과 수영, 승마 등 4개 종목 선수 44명이 9월 18일 일찌감치 일본으로 갔다. 본진인 2진은 10월 초에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북한 선수단이 일본에 조기 입국한다는 소식에 따라 9월 23일 서둘러 출국했다. 선수단은 하네다국제공항에서 재일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대회 기간 재일동포들은 열과 성을 다해 모국의 선수단을 지원했다. 

북한 선수단은 대회 개막을 닷새 앞둔 10월 5일 1진이 니가타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북한 선수단은 도착 사흘 만인 10월 8일 올림픽을 보이콧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 선수단이 보이콧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조선민주주의공화국 대신 북한(North Korea)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육상경기연맹과 국제수영연맹 그리고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는 1963년 1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가네포대회(The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 신생국경기대회)에 출전한 선수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의해 12개월 동안 올림픽 참가 자격이 정지됐기 때문에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북한 선수 6명과 인도네시아 선수 11명은 대회 출전이 금지됐다. 대회 출전이 금지된 북한 선수 가운데에는 가네포대회 3관왕이자 당시 기준 400m와 800m의 세계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육상 선수 신금단이 들어 있었다. 북한은 신금단이 출전하지 못하면 올림픽 출전에 따른 체제 선전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가네포대회는?

가네포대회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1962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 4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정치적인 이유로 이스라엘과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의 출전을 막았다. 이는 명백히 스포츠를 정치에 물들인 행위였다. IOC는 인도네시아에 무기한 자격 정지 징계를 내렸다. 이는 IOC가 특정 회원국에 징계를 내린 첫 번째 사례다. 그러자 아반드리오 인도네시아 외무장관은 "제국주의자들이 이끄는 기존 대회에 대항해 아시아, 아프리카 신생국들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대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63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은 IOC 탈퇴와 함께 가네포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해 11월 자카르타에서 소련과 중국, 북한, 쿠바, 동독, 세네갈 등 51개국 2,00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가운데 제 1회 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 대회에 나선 소련의 자세가 모호했다. 소련은 아시아, 아프리카 제 3세계 나라들과 연대를 과시하게 위해 선수들을 파견했으나 IOC 내에서 자신들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는 모두 뺐다. 

제 2회 가네포대회는 1967년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취소됐다. 결국 제 2회 대회는 아시아 지역 외 나라로는 아프리카의 기니만 출전한 가운데 1966년 11월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그래서 '아시아 가네포대회'로 불린다. 두 번째 '아시아 가네포대회'는 1970년 평양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대회는 이후 영원히 개최되지 않았다. 정치와 스포츠를 철저히 분리하는 IOC에 맞서 정치와 스포츠를 엮으려 했던 가네포대회는 물거품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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