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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축구 한일전 D-1…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

작성일: 2018.08.31 11:03 신명철 편집 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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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달 1일 열리는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일본과 결승전에 나서는 한국 선수들은 필승 의지를 다지고 있다. ⓒ연합뉴스

- 스포티비뉴스 신명철 편집 위원 칼럼 

[스포티비뉴스=아시안게임 특별취재단 신명철 기자] 누구는 "일본에 지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겠다는 농담도 했습니다"라고 했고 누구는 "일본한테 지면 여기(인도네시아)에서부터 수영해서 (한국에) 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음 달 1일 열리는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을 앞둔 선수들이 필승 의지를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한일전은 종목을 막론하고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선수들을 짓누른다.

그런데 한일전과 관련해 이런 표현은 반세기 전에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축구는 민족정신을 일깨웠다. 그 무렵 열린 일본 내 주요 대회에서 한반도 지역 팀들이 거둔 성적은 눈부셨다. 교토 퍼플상가 시절 박지성이 뛰기도 했던 일본 FA컵 격인 일왕배일본축구선수권대회는 1921년 창설됐다. 일본축구협회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 대표 팀 전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1935년에 열린 이 대회에 한반도 지역 팀 참가를 처음으로 허용했다.

대회는 1935년 6월 도쿄에서 열렸는데 조선축구협회는 한 달 앞서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해 조선축구단(오늘날의 국가 대표 팀)을 꾸렸다. 이 팀에는 한국 축구의 영원한 스승인 김용식 선생, 발이 엄청나게 빨라 ‘군산 오토바이’라는 별명이 붙은 채금석 선생 등이 있었다.

조선축구단은 준결승에서 나고야 팀을 6-0으로 대파했고 결승에서는 문리대학을 6-1로 꺾고 우승했다. 이듬해 대회에는 보성전문이 출전해 결승에서 게이오대에 2-3으로 져 준우승을 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회가 중단될 때까지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등이 출전해 꾸준히 상위권에 들었다.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났지만 한국과 일본이 축구에서 맞붙은 건 1954년에 이르러서였다.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인데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강경 대일 외교 정책 때문에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 홈경기를 일본에서 치러야 했다. 1차전에서는 5-1로 대승을 거뒀고, 2차전은 2-2로 비겼다.

이 경기에 나서기에 앞서 경무대(오늘날의 청와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이유형 대표 팀 감독이 한 말은 아직까지도 한일전을 앞두면 인용되곤 한다. “일본전에서 이기지 못하면 선수단 모두가 현해탄[玄海灘, 겐카이나다→대한해협]에 몸을 던지겠다.”

이 경기를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은 주요 대회에서 번번이 마주쳤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예선에서 한국과 일본은 두 번째로 만났는데 이때도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땅에서는 일장기를 절대로 올릴 수 없다며 일본 선수단 입국을 거부해 홈경기를 또다시 도쿄에서 치렀다.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홈경기 포기는 코미디 같은 일이긴 하다.

예선 1차전에서 한국은 일본에 0-2로 지고 2차전에서 2-0으로 이겼다. 그런데 1950~60년대는 국내 대회는 물론 일부 국제 대회에서도 연장전이나 승부차기 같은 승패를 가르는 제도 대신 추첨을 했다. 이 무렵 축구 경기를 본 중·장년 팬들은 흰 종이에 ○ 또는 ×를 적어 놓은 쪽지를 그라운드에 던진 뒤 각 팀 주장이 한 장씩 집어 드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국은 추첨에서 져 멜버른 올림픽에 나서지 못했다.

이후 1960년 로마 올림픽 예선, 1962년 칠레 월드컵 예선 등에서 한국과 일본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의 경우 일본은 대회 개최국 자격으로 자동 출전했고 한국은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과 베트남을 물리치고 본선에 올랐다.

일본이 동메달을 차지한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예선은 1967년 9월 도쿄에서 벌어졌다. 한국은 이 예선에서 일본에 골 득실 차에서 뒤져 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그때 대표 팀 주력 선수인 김호 김정남 이회택 등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도쿄발 서울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일본과 3-3으로 비긴 경기가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 경기 전까지 한국은 일본전 상대 전적에서 7승3무3패로 앞서 있었다. 그리고 도쿄 원정에서도 3승1무2패로 우위를 보였다.

일본과 경기가 끝나기 직전 터진 김기복의 중거리 슈팅이 일본의 크로스바를 맞고 나왔다. 이 한 방으로 한국 축구는 일본이 ‘탈 아시아’를 외치며 으스대는 꼴을 한동안 지켜봐야 했다.

글쓴이는 축구 한일전과 관련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경기가 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 예선이 이제는 흔적도 없어진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예선에 나선 일본은 1년여 전 있었던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스기야마 류이치 미야모토 데루키 등을 포함한 호화 멤버로 구성돼 있었다.

한국은 1969년 10월 12일 열린 일본과 1차전에서 김기복과 박수일의 골로 2-2로 비겼고, 10월 14일 호주와 2차전에서는 1-2로 졌다. 그리고 10월 18일 벌어진 일본과 2차전에서 정강지의 연속 골에 힘입어 2-0으로 이겨 예선 통과의 불씨를 살렸다.

까까머리 글쓴이는 그날 경기를 보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종로 길을 걸어가면서 “일본을 통쾌하게 이긴 이 경기, 평생 잊지 못할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은 글쓴이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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