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호 KOC 위원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서울 올림픽 조사단으로 방한한 ANOC 대표단을 맞아 환담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IOC는 1981년 3월 11일자 전문으로 ANOC, IOC, ISF 등 3대 국제 스포츠 기구의 조사단 파견 계획을 KOC에 통보하고 조사단이 방한할 때 서울시의 기존 스포츠 시설과 숙박 시설, 도로 교통망과 언론 현황 그리고 앞으로 경기장 건설 계획 등 제반 사항의 조사에 성실히 나서도록 요청했다. 원칙적으로 국제 기구 조사단을 맞이할 주체는 유치 도시인 서울시였으나 이때까지도 서울시는 뒷전이어서 할 수 없이 KOC가 전면에 나서서 조사단을 맞을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3월 28일 미국 NOC 돈 밀러 사무총장과 영국 NOC 리처드 팔머 위원장이 ANOC 대표로 내한했다. 돈 밀러가 가장 먼저 조사단으로 온 것은 한국으로서는 행운이었다. 돈 밀러는 한국 전쟁 직후인 1954년 주한 미군에 배속돼 2년간 근무하면서 폐허의 땅 한국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한파로 25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KOC 관계자들의 안내로 건설 중인 잠실의 올림픽 주 경기장과 태릉사격장, 태릉선수촌을 둘러보고 활기찬 서울을 목격하면서 서울의 올림픽 개최 능력을 확신한다. 서울과 경쟁 도시인 나고야를 먼저 들러 조사를 마친 이들은 4월 28일 두 도시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IOC에 제출했다.

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서울과 나고야는 IOC의 요구 사항에 충실히 답했고 서울은 대도시로 놀랄 만큼 편의 시설 등 인프라 구축이 잘돼 있는 반면 나고야는 비교적 작은 도시로 정비는 잘돼 있으나 시골 풍경이 많았다. 스포츠 시설의 경우 서울은 대부분 경기장을 건설하고 있었으나 나고야는 제반 시설이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숙박 시설도 서울은 큰 문제가 없었으나 나고야는 전망이 밝지 못하다’고 돼 있어 서울이 우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NOC 조사단에 뒤이어 내한한 IOC 조사단은 오네스티 이탈리아 IOC 위원, 제임스 워럴 캐나다 IOC 위원, 페르로 바스케스 멕시코 IOC 위원 등 6명으로 구성됐고 이들 역시 서울시의 올림픽 개최 여건을 샅샅이 살펴본 뒤 매우 만족스런 평가를 내리면서 애초 일정에 없는 실무 협의회를 가져 구체적인 사항을 협의하는 자세를 보였다.

실무 협의회를 마친 캐나다의 워럴 위원은 국제 경기 연맹이 경기 기술적인 측면에서 IOC보다 요구 사항이 더 많고 또 구체적일 것이라며 특히 조정과 근대5종, 승마의 경기장 및 연습 시설에 유념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또 멕시코의 바스케스 위원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조직위원장을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건설 중인 주 경기장 외에 둔촌동 올림픽 공원 안에 또 하나의 주 경기장을 건설하려는 계획은 예산 낭비이므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진심 어린 충고도 했다.

ANOC와 IOC 조사단이 다녀간 2개월여 뒤인 1981년 6월 9일 네델란드의 아드리안 폴렌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이 국제 기구의 마지막 조사단으로 내한했다. 1951년부터 3년간 유엔한국부흥위원단(UNKRA)으로 한국에 머물렀던 폴렌 회장은 주로 경기 기술적인 측면에서 조사 활동을 마친 뒤 서울의 경이로운 발전에 감탄하면서 ‘뉴욕이나 도쿄에 비해 손색없는 현대 도시인 서울을 전 세계에 알리면 유치 활동에 큰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머물러 누구보다도 한국을 잘 아는 국제 스포츠계의 영향력 있는 거물급 인사인 폴렌 회장과 돈 밀러 미국 NOC 사무총장이 올림픽 조사단의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3개 국제 기구 조사단의 실사가 끝난 뒤 정주영 유치준비위원장은 정부의 올림픽 유치 방침만 확고하다면 유치 활동을 위한 경비를 아낌없이 지원하겠다고 천명해 체육계의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올림픽 유치단은 당시 상황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설사 실패하더라도 세계를 상대로 한국을 널리 알린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스포츠라는 차원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하고 경제 발전에서도 새로운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는 대국적인 틀에서 총력전을 펴기로 했다. 서울이 나고야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지만 나고야가 갖고 있던 기득권을 서울이 역이용하면 의외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발상도 필요했다.

나고야는 한국은 동서 냉전의 국제 정세 속에서 남북 분단국이라는 정치적인 취약점으로 공산권의 강력한 반대를 극복해야 하고 1978년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빼고는 이렇다 할 큰 대회를 치른 경험이 없다는 점을 내세웠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제력도 올림픽을 치르기에는 무리이고 유치 활동 또한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판단으로 방심하고 있었다.

일본은 월등한 경제력에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치렀다는 자부심 그리고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탄탄한 인맥 등 어느 하나 부족한 게 없는 듯 보였다. 게다가 나고야 출신으로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기요카와 마사지가 IOC 부위원장으로 수년간 IOC는 물론 국제 스포츠 기구의 거물급 인사들과 친분을 쌓은 터라 한국으로서는 좀처럼 돌파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지만 일찌감치 샴페인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은 예상치 못한 한국의 저돌적인 추격 앞에 취약점을 하나씩 드러내며 조금씩 무너져 내렸고 한국에 대한 국제 스포츠계의 부정적인 시각도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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