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롯데 염종석(왼쪽에서 2번째)은 1992년 17승을 거두며 신인왕에 오른 뒤 포스트시즌에서도 4승1세이브를 수확했다. 28년 전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운 염종석이 대선배 윤학길(왼쪽)에게 축하를 받고 있다. ⓒKBO
[스포티비뉴스=고척, 이재국 기자] 모두의 예상은 경험 많은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 그러나 실제 선택은 만 19세 햇병아리 고졸 신인 염종석.

올드팬들이라면 이쯤에서 짐작을 할 듯하다. 1992년 가을 이야기다. 그해 준플레이오프(준PO) 1차전 롯데 선발투수 얘기를 꺼내려 한다.

갑자기 28년 전의 추억을 소환하는 것은 9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20 신한은행 SOL KBO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PO) 1차전에 선발등판한 고졸신인 kt 위즈 소형준 때문이다.

소형준은 두산 타선을 맞아 6.2이닝 동안 100개의 공을 던지며 단 3안타 1볼넷만 내준 채 4탈삼진 무실점으로 역투를 펼쳤다. 28년 전 염종석처럼 만 열아홉 살 나이로 포스트시즌 1차전 선발투수로 낙점 받은 것도 이례적인데, 마치 10년 이상 프로 물을 먹은 투수처럼 완벽한 투구와 경기운영을 펼친 점도 그날의 염종석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28년 전 염종석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형준은 승리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 두산 선발투수 크리스 플렉센에 kt 타선이 눌리면서 팀이 2-3으로 패하고 말았다.

2006년 괴물 신인 류현진은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로 나섰지만 패전투수가 됐고, 올해 괄목할 만한 기량을 선보인 LG 신인 이민호도 준PO 1차전 선발투수로 나섰지만 패전을 떠안았다. 그리고 이날 소형준도 승리를 얻는 데 실패했다.

▲ kt 위즈의 만 19세 고졸 신인투수 소형준은 9일 플레이오프 1차전에 선발등판해 6.2이닝 3안타 1볼넷 무실점의 역투를 펼쳤다. 1992년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완봉승을 거둔 롯데 염종석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빛나는 투구였다. ⓒ고척, 곽혜미 기자

이로써 한국야구사에 만 19세로 포스트시즌 1차전 선발로 나서 승리를 올린 투수는 여전히 염종석이 ‘유일남’으로 기록돼 있다. ‘야구여행’은 28년 전 그 전설을 찾아 떠난다.

◆ 소형준을 보고 1992년 염종석을 떠올리다

"올해 플레이오프 1차전을 처음부터 끝까지는 못 봤는데 소형준 선수 하이라이트는 봤어요. 정말 잘 던지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니 제 신인 때 생각도 살짝 났습니다. 자신감 있게 패기로 던지던데 역시 어린 투수는 패기로 붙어야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올해 창단한 동의과학대 감독을 맡고 있는 염종석(47)은 소형준을 보면서 28년 전 자신을 반추했다. 씩씩하게 던지는 소형준의 모습이 흡사 그날의 자신과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염종석은 신인 첫해 직구와 슬라이더 투피치로 상대 타자를 압도한 투수였다. 소형준은 투심패스트볼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 등 다양한 구종과 완벽한 제구, 완급조절까지 갖춘 투수다. 다소 다른 유형이라고는 해도 10대의 나이에 포스트시즌이라는 큰 무대에서, 그것도 1차전에서 모두의 심장을 들썩거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소형준을 보고서 28년 전 염종석을 떠올린 인물은 또 있었다. 바로 1984년과 1992년 롯데가 두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 모두 사령탑을 맡았던 강병철(74) 전 롯데 감독이다.

"소형준이라는 고졸 신인투수가 올해 좋은 성적을 올렸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직접 투구하는 걸 제대로 본 것은 이번 플레이오프 1차전이 처음이었어요. 정말 잘 던집디다. 1992년 염종석이 생각날 만큼. 좋은 투수가 나타났어요. 요즘 다들 강속구만 얘기하는데 제구력이 그렇게 좋은 신인투수는 오랜 만에 보는 것 같네요. 분명 더 발전하고 좋은 투수가 될 겁니다."

소형준의 출현에 야구인들은 모두 하나 된 마음으로 기뻐했다. kt 이강철 감독은 준PO 1차전에 패했지만 소형준에 대해서만큼은 "무슨 말로도 칭찬하기 어렵다. 역대급 투수가 나왔다"고 말했고, 적장인 두산 김태형 감독 역시 경기 후 승장 인터뷰를 하면서 "대단한 투수의 등장이라고 생각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1992년 롯데 강병철 감독과 염종석. 롯데는 이 해에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롯데 자이언츠
◆ 윤학길 박동희 제치고 염종석 준PO 1선발

시계바늘을 1992년으로 돌려보자. 롯데는 정규시즌 3위로 포스트시즌 티켓을 잡았다. 가을야구 첫 관문, 준PO부터 시작해야 했다. 롯데로선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8년 만에 가을잔치 무대에 나섰는데, 공교롭게도 8년 전 한국시리즈 상대였던 삼성과 격돌하게 됐다.

3전2선승제의 단기 승부에서 1차전 승리의 중요성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1989년 처음 도입된 준PO에서 1991년까지 3년 연속 첫 판을 잡은 팀이 다음 스테이지인 PO 무대에 올랐다.

롯데는 마운드에 빅3를 보유하고 있었다.

1961년생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 1991년 17승에 이어 1992년에도 17승(5패2세이브)을 올리며 평균자책점 3.61으로 건재를 과시했다.

또 다른 후보는 1968년생으로 아마추어 시절부터 선동열과 견줄 만한 강속구를 뿌리던 '슈퍼 베이비‘ 고(故) 박동희. 1990년 데뷔 시즌엔 10승에 머물렀지만 1991년엔 14승9패3세이브, 평균자책점 2.47로 명불허전임을 입증했다. 1992년 7승4패1세이브로 주춤했으나, 후반기에 연승 가도를 달리며 에이스의 위용을 되찾고 있었다.

여기에 1992년 부산고를 졸업하고 롯데에 입단한 새내기 염종석. 그해 정규시즌에서 17승9패6세이브를 거두며 다승 공동 3위에 올랐고, 평균자책점은 2.33으로 1위였다.

누가 1차전 선발로 나서든 이상하지 않을 투수들. 그렇지만 대부분 롯데의 1차전 선발투수를 예상하기로는 경험 많은 윤학길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그러나 롯데 강병철 감독은 일반적인 예상을 뒤엎었다. 가을야구의 문턱에 서서 첫판을 19살 고졸신인 염종석에게 맡기는 파격적인 승부수를 던졌다.

▲ 롯데 염종석의 피칭 모습 ⓒ롯데 자이언츠
◆ 당일 선발 통보, 경기 전 화장실 변기 1시간 붙잡은 염종석의 사연

1992년 9월 25일 사직구장. 당시엔 요즘처럼 선발투수 예고제가 없었다. 강병철 감독은 야구장에 나와서도 선발투수를 공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사자인 염종석에게도 당일 오후 3시에서야 선발로 등판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강병철 감독은 이에 대해 "아무래도 고졸신인이다 보니까 전날에 알려주면 잠도 못 잘 것 같아 당일 아침에 이충순 투수코치한테 얘기를 전해주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염종석 역시 이날의 상황을 잊을 수 없다.

"제 짐작으로는 ‘윤학길 선배가 당연히 1차전 선발로 나가겠지’라고 생각했어요. 그해에 저는 17승 올렸으니까 신인으로서 할 건 다했고, 축제를 즐기자고 생각하고 오후 3시쯤 경기장에 도착해서 몸을 풀고 있었죠. 당시 이충순 투수코치님이 다가오시더니 저한테 이런저런 농담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는 돌아서서 가시면서 ‘염종석 너 오늘 선발이야’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까. 갑자기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속이 울렁거려서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토할 것도 없는데 1시간 동안 변기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나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은 경기 전에 아무 것도 먹지도 못하고 마운드에 올라갔습니다."

염종석은 1992년 준PO 1차전 선발로 통보받을 당시를 추억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 1992년 롯데가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빙그레를 꺾고 우승을 확정하자 고 박동희 투수와 김선일 포수가 얼싸안고 기뻐하고 있다. 이것이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 마지막 장면이다.ⓒKBO
◆ 삼성 상대 9이닝 셧아웃…1992년 PS 4승1세이브 신화

그러나 안경 쓴 루키는 경기 시작부터 거침이 없었다. 1회초를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러자 롯데 타선은 1회말 선취점을 뽑았다.

삼성 선발투수는 ‘만만디’ 성준. 롯데는 ‘대도’ 전준호, ‘자갈치’ 김민호, ‘호랑나비’ 김응국, ‘3루타의 사나이’ 이종운 등 강한 좌타군단을 보유했다. 삼성 김성근 감독은 이를 겨냥해 좌완 성준 카드를 꺼내들었던 것이다.

1회말 롯데 1번타자로 나선 좌타자 전준호가 좌완 성준을 공략했다. 좌익선상 2루타를 치면서 포문을 열었다. 한영준의 희생번트로 1사 3루. 여기서 3번타자 박정태가 좌중간 적시타를 날리면서 1-0으로 앞서나갔다.

모두들 이 점수가 경기 중반을 넘어 후반까지 이어질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지만, 8회초까지 스코어는 그대로 1-0. 다시 말해 염종석이 무실점 역투로 삼성 타선을 막아나가고 있었다는 의미다. 삼성 성준도 1회 실점 이후 무실점 투구를 이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잠잠하던 파도는 8회말 물결쳤다. 롯데는 7번부터 하위타선으로 이어져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대박이 터졌다. ‘움직이는 화약고’ 공필성이 볼넷을 골라나가며 찬스를 잡았다. 여기서 8번타자 대졸신인 박계원이 오른쪽 담장을 때리는 3루타를 날렸다. 스코어는 2-0으로 벌어졌다. 1점차 리드에 숨을 죽이던 부산 팬들은 열광의 도가니. 이어 9번타자 김선일이 2루타를 날렸다. 3-0으로 달아나자 축제 분위기.

염종석은 9회까지 108구를 던지며 5안타 5탈삼진 무실점 완봉승을 올렸다. 무엇보다 4사구가 단 1개도 없었을 정도로 정면승부를 펼쳤다. 직구와 슬라이더 투피치 투수지만, 슬라이더의 휘어지는 각도와 꺾이는 속도가 삼성 타자들이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예리했다. 9회가 끝날 때까지 2명의 주자를 내보낸 이닝이 한 번도 없었다.

역대 최연소 포스트시즌 완봉승. 롯데의 염종석 카드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100%를 넘어 기대에 200% 부합하는 성과였다. 삼성 선발투수 성준도 두뇌피칭으로 8회까지 3실점으로 나름 호투했지만 완투패를 당했다.

롯데는 3차전까지 진행된다면 윤학길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 이전에 2차전 선발투수로 박동희를 내세웠다. 4-0 완봉승. 롯데는 준PO 1차전에서 염종석이 완봉승을 올리더니 2차전에서도 박동희 완봉으로 플레이오프에 손쉽게 진출했다.

마운드의 출혈 없이 해태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면서 결국 3승2패로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그리고 빙그레를 4승1패로 물리치고 롯데 역사상 두 번째이자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게 됐다.

염종석은 플레이오프에서 2승(1구원승 포함) 1세이브를 거뒀다. 이어 한국시리즈에서 1승을 기록하면서 1992년 포스트시즌에서만 4승1세이브를 올리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예전엔 1992년 우승 이야기 나오면 염종석 이야기 나오고 그러니까 자랑스럽고 뿌듯했는데 지금은 솔직히 그런 얘기 나오면 조금 부끄럽습니다. 이제 롯데가 우승을 할 때도 됐는데…. 어쨌든 앞으로 롯데가 우승을 하더라도 투수 1~2명에 의존해서 우승하는 게 아니고 팀 밸런스가 맞아서 우승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이제 제2의 염종석이 나와서는 안 되죠. 그런 시대도 아니고요."

▲ 2006년 한화 류현진의 신인 시절 투구 모습 ⓒ한화 이글스
◆ 류현진도 소형준도 실패한 만 19세 PS 승리투수

염종석이 1992년 만 19세 나이로 포스트시즌 1차전에 선발로 나가 승리투수가 될 때만 해도 이후 누군가가 나타나 염종석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우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괴물’ 류현진이다. 2006년 한화에 입단하자마자 포스트시즌에 올랐고, 삼성과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로 나섰다. 그러나 당시 최고 구위를 자랑하던 삼성 배영수와 선발 맞대결에서 0-4로 패하면서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다. 류현진은 4.1이닝 2실점을 기록했다.

올해 소형준보다 먼저 포스트시즌 1차전 선발로 나선 19세 투수가 있었다. 바로 두산과 준PO 1차전에 선발등판한 LG 이민호였다. 이민호는 3.1이닝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그리고 9일 소형준이 두산과 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로 나섰지만 그가 마운드를 지킨 6.2이닝 동안 양 팀의 득점은 없어 승패 없이 물러났다.

만약 소형준이 이날 선발승을 거뒀다면 1992년 염종석에 이어 역대 2번째 19세 고졸신인 포스트시즌 1차전 선발승의 주인공이 될 뻔했지만, kt 타선이 상대 선발투수 크리스 플렉센에 밀리면서 염종석의 가을신화에 합류하는 데 실패했다.

만 19세 고졸신인으로 포스트시즌 1차전에 선발등판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승리투수가 되는 것은 이만큼 어렵다.

1992년 열아홉 살 염종석의 포스트시즌 1차전 완봉승은 전설로 남을 듯하다. 그것이 준PO가 됐든, PO가 됐든, KS가 됐든….

스포티비뉴스=고척, 이재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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