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껍질을 스스로 깨고 나온 김택형은 리그 최정상급 좌완 불펜 자원으로 거듭났다 ⓒ곽혜미 기자
[스포티비뉴스=김태우 기자] 지난 1월. 김원형 SSG 감독의 방에는 전력 구상에 여념이 없는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그리고 선수단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화이트보드의 뎁스차트를 바라보던 김 감독은 두 명의 ‘변수’에 주목한다. 투수로는 김택형(25), 야수로는 지금은 트레이드로 팀을 떠난 정진기(29)였다.

이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SSG 최고의 재능들이었다. 김택형은 150㎞를 던질 수 있는 좌완이라는, 말 그대로 구할 수 있다면 지옥에라도 들어가야 할 선수였다. 정진기는 20개의 홈런과 20개의 도루를 모두 기록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지도자들이 눈독을 들이는 게 당연했다. 오프시즌만 되면 이 선수들을 터뜨려보겠노라 온갖 구상과 노력이 오가곤 했다. 그러나 이들은 껍질을 깨지 못하고 있었다. 

김 감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연히 욕심이 나는 선수들이었다. 제대로 터뜨린다면 팀 전력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김 감독은 생각을 달리했다. 이전 지도자들과는 조금 다른 방법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개입이 아닌, 자율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두 선수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김 감독은 “욕심이 나는 선수들이지만 그냥 선수들이 알아서 하게 놔둬보려고 한다. 선수들에게 ‘네 마음대로 해봐라’고 이야기했다. 특히 진기는 제주 캠프에도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다고 전력 구상에서 배제된 건 아니다. 솔직히 나도 기대가 크다. 하지만 선수들이 자신의 것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의외의, 돌이켜보면 결정적인 선택의 출발이었다.

숱한 시행착오, 그러나 김택형은 웃고 있었다

제주 캠프의 김택형은, 정해진 ‘보직’이나 ‘활용 방안’이 없는 선수였다. 김 감독도 시간이 조금은 걸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시즌 초반부터 뭔가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김택형은 매년 오프시즌마다 투구폼과 싸운 선수였다. 많은 지도자들은 150㎞를 던질 수 있는 이 재능이, 제구 문제만 해결하면 리그를 지배할 만한 투수가 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항상 화두가 된 것이 ‘밸런스’, ‘안정감’과 같은 단어였다. 

누구도 나쁜 뜻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 선수가 잘 되라고 노력한 일이었다. 김택형도 이를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나 프로 입단 후 매년 바뀌는 폼에 오히려 자기 것이 하나도 없는 평범한 좌완 투수가 되어 있었다.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김 감독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확실한 자기 폼을 찾으라는 주문이었다. 용기를 얻은 김택형은 과감한 폼 변신에 나섰다. 자기 주도적인 과정이 즐거웠던 것일까. 제주 캠프의 김택형은,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렇게 폼이 다시 한 번 바뀌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이 해답을 찾아나간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전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김택형은 “플레이트에 왼발을 반만 걸치고, 반은 땅에 놨다. 예전에는 대각선으로 밟고 던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것이라 나만의 고집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키킹할 때부터 중심이 안 잡히고 제구가 왔다 갔다 했다”면서 “일자로 맞춰놓고 던져보자는 생각에 지금은 똑같이 맞춰 놓고 던진다. 확실히 안정감이 생기고, 밸런스도 일정하게 잡힌 것 같다”고 가장 큰 변화를 설명했다.

▲ 김택형은 누구의 도움보다는 자기 주도적으로 폼을 바꿨고, 그 폼은 선수 생활의 큰 자산이 됐다 ⓒSSG랜더스
전설적인 좌완 투수인 구대성의 폼도 스스로 찾아 벤치마킹했다. 김택형은 “너무 힘으로만 던지니 글러브를 낀 팔이 많이 열렸다. 구위가 내 장점인데 포기할 수는 없고, 그래서 찾아낸 게 구대성 선배님의 폼이다. 그 폼을 참고하면 닫고 던진다고 해도 힘을 쓸 때 포인트가 일자로 맞춰지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면서 “지금은 다리가 크로스로 닫혀있다. 전에는 완전히 열어 놨다. 글러브를 낀 팔이 많이 열리고 꽂히고 날리는 공들이 많았다. 그 반을 닫아놓으니 지금은 조금 열려도 가운데가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도 면담 자리에서 김택형은 계속해서 해보겠다고 이야기했다. 김 감독에게 “폼에 대해서는 건들지 않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절박함이 있었다. 김택형은 “너무 바꾸다보니 내가 공을 어떻게 던지는지 모르겠고, 내 폼이 뭔지 말조차 못할 상황이었다”고 했다. 김 감독은 김택형을 밀어줬다. 이번에도 “폼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어깨를 두드렸다. 김택형도, 김 감독도 유혹의 첫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껍질은 누가 깨주는 것이 아닌, 스스로 깨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적응이 필요했다. 김택형도 “캠프 시작 때부터 폼이 자리 잡는 데까지 4~5개월 걸렸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시즌 초반 성적도 좋지 않아 2군에 갔다. 그러나 김 감독은 투구 폼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김택형 또한 “2군 갈 때 하셨던 말이 ‘자신 있게 던지고 오라’고 하셨다. 사실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어차피 올릴 거니까 2군 가서 자신 있게 던지고 오라고 하셔서 용기를 많이 얻었다”고 떠올렸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시즌 시작까지만 해도 6~7점대 평균자책점에 머물던 김택형은 2군에서 투구폼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승승장구 중이다. 김택형은 5월 이후 46경기에서 56⅔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1.91을 기록 중이다. 리그 최정상급 좌완 불펜의 성적이다. 처음에는 추격조로 시작했지만, 필승조를 거쳐 이제는 팀의 마무리 투수까지 승격했다. 일정이 고되기는 하지만, ‘성취감’을 느낀 김택형의 얼굴은 여전히 밝다.

야구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시기였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닌, 스스로 해답을 찾았다는 점에서 이 폼은 평생 잊지 못할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김택형도 현재 성적보다는 그 점을 가장 큰 성과로 생각한다. 김택형은 “이제는 내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된다”고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폼을 바꾸며 성장통을 겪었지만, 그 과정들이 모여 지금의 폼이 됐다고 이야기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투구 폼이 정말 수도 없이 바뀌었다. 정답이 없는 것 같다. 나한테 맞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맞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내 것을 찾는 게 중요한데, 누가 찾아주는 게 아니다는 걸 많이 느꼈다. 내가 생각을 하고 연구를 해야 한다”면서 “그동안 폼을 많이 바꾸면서 안 좋은 것도 있었지만, 오히려 배운 것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험들을 모아 내가 생각을 해서 이 폼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돌아온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김택형은 “5년이라는 시간이지만, 어떻게 보면 빨리 왔다고도 생각한다. 그렇게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26살인데 팀에서 한 축을 맡고 있다.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숨을 돌리니 다음이 보인다. 그는 “150㎞라는 메리트가 있다. 그리고 내가 던져왔던 스피드다. 수술을 하고 나서 그 스피드까지는 못 올라왔는데 올해는 팔꿈치도 아프지 않기 시작했다. 내 공을 던질 수 있고, 그것 때문에 제구도 어느 정도 잡힌 것 같다”고 본격적인 발진을 다짐했다.

KBO리그의 육성 시스템은 대개 코치와 선수라는 사제 관계 안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유독 “이 코치가 이 선수를 키웠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물론 선수 혼자 성장하는 것은 아니니 이런 이야기에 흠을 낼 이유는 없다. 그러나 결국 성장을 해야 하는 주체는 선수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선수가 이해하고, 실행에 옮기고, 선수가 코치보다 더 고민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김택형의 지난 세월이 보여주고 있다.

김 감독은 개입 대신 믿음이라는 마법을 불어넣었다. 껍질을 밖에서 깨주기보다는, 스스로 깨고 나올 수 있도록 그저 따뜻하게 품기만 했다. 김택형도 “어떻게 보면 그 전까지 내가 해왔던 걸 보면 믿음이 없었을 수도 있었는데 끝까지 믿어주셨다. 그 부분에 대해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달걀은 스스로 깨고 나오면 병아리라는 생명체가 되지만, 급하다고 밖에서 깨면 후라이 신세밖에 안 된다. 비로소 투수가 된 김택형의 미래에 조심스레 더 큰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이유다. /SSG 담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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