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키워드 키워드 기준 i금일 기준 많이 본
뉴스 기사의 키워드 수집

한국 올림픽 출전사① 여명기의 한국인 올림피언들, 1932년 LA에 가다

작성일: 2016.07.06 13:0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왼쪽)와 권태하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일제 강점기인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여름철 올림픽은 6차례 열렸다. 이 기간 제국주의 일본은 1912년 스톡홀름 대회에 2명의 육상 선수를 파견하는 등 모든 대회에 출전했다. 한국인의 올림픽 대표 선발에 인색했던 일본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에 이르러서야 3명의 한국 선수를 뽑았다. 이 대회의 일본 선수단은 131명이었다. 성적도 좋았다. 금메달과 은메달 7개, 동메달 4개로 종합 순위 5위에 올랐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의 권태하와 김은배, 복싱 라이트급의 황을수는 1920년 한국인이 조직한 조선체육회가 뽑아 올림픽에 파견한 것이 아니다. 일본에 나라를 강점당하고 있던 그때 일본 대표 선발전에 나갈 수 있는 조선 지역 대표는 일본인의 조직인 조선체육협회가 선발하게 돼 있었다.

1932년 5월 25일 도쿄에서 열린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파견 일본 마라톤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는 츠다 세이치 등 일본 선수 4명 가운데 상위 입상자 3명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일본인들 생각으로는. 그러나 권태하가 2시간36분49초로 1위, 김은배가 2시간38분3초2로 2위를 차지했다. 츠다가 2시간38분18초2로 3위였다. 최종 선발전에서 1위와 2위를 했으니 일본인들도 어쩔 수 없이 권태하와 김은배를 올림픽에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림픽 개막을 20일쯤 앞두고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뒤 일본인 임원은 츠다에게만 코스 답사를 시켰다. ‘조선인 선수’보다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츠다는 딱딱한 도로를 달리는 데 알맞은 탄력이 좋은 신발을 마련해 놓았으나 코스 사정을 전혀 몰랐던 김은배는 서울의 흙바닥을 달릴 때 신었던 홑버선 신발 그대로였다. 탄력이 좋은 신발을 신지 못한 김은배는 현지 훈련에서 아스팔트 바닥을 열심히 달리는 바람에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와 통증을 느끼게 됐다. 김은배는 뒤늦게 탄력이 좋은 신발을 장만했으나 컨디션을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조선 지역 예선과 도쿄에서 벌어진 최종 선발전 등 두 차례 경기를 치른 데다 태평양을 건너는 오랜 선상 생활로 피로가 쌓인 권태하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마라톤 코치를 겸했던 츠다는 경기를 앞두고 권태하와 김은배에게 자기를 앞지르지 말고 달리라는 지시를 내렸다. 권태하는 이 지시를 무시했지만 나이 어린 김은배는 츠다의 지시에 묶여 결국 2시간37분28초로 6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경기 도중 길가의 관중들 속에서 “김은배, 뛰어라!”라는 우리말이 들렸고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하는 동포들에게 김은배는 감동했다. 경기 중반 다리에 경련을 일으킨 권태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 거의 실신 상태로 비틀거리며 완주해 2시간42분52초로 9위가 됐다. 

마라톤 우승은 2시간31분36초를 기록한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소 사발라가 차지했다. 츠다는 2시간35분42초로 5위에 그쳤다. 28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20명이 완주했고 아시아인은 김은배와 권태하, 츠다 3명이었다.   

황을수는 복싱 라이트급 1회전에서 독일의 프란츠 칼츠와 잘 싸웠으나 판정패했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김은배가 6위, 권태하가 9위를 각각 차지했다는 소식은 겨레에게 희망을 안기는 희소식이었다. 신문들은 ‘김 군의 마라톤 입상’, ‘비장(悲壯) 권 군의 골인’, ‘조선 체육 사상 대수확’ 등 제목을 달고 레이스 경과를 상세히 보도했다. 9월 14일 올림픽 출전 선수들이 서울에 돌아올 때 동아일보는 사회면 톱에 ‘국제 무대에서 활약한 김 군의 개선’이라는 제목을 달고 크게 보도했다.

김은배는 로스앤젤레스 동포들이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베푼 한국인 선수 환영식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다. 그리고 경기 도중 동포 응원단이 흔드는 태극기에 조국을 느꼈다. 김은배는 동포가 준 태극기를 몰래 감춰 지니고 귀국해 뜻이 통하는 동아일보 기자 이길용에게 전했다. 이길용은 그 태극기를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는 날까지 지니고 있다가 광복이 되자 그 태극기를 본 삼아 여러 장의 태극기를 그려 많은 사람들에 나눠 주어 그들로 하여금 광복 만세 대열에 참가하도록 이끌었다.

이길용은 4년 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말살(抹殺)하는 의거를 일으킨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