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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 ⑫충격의 ‘검은 9월단’사건…재일동포 오승립 유도에서 유일한 메달

작성일: 2016.07.17 07:0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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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뮌헨 올림픽 유도 80kg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오승립(왼쪽)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1972년 뮌헨 올림픽은 121개국 7,1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8월 26(이하 현지 시간) 화려한 막을 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9월 5일의 참극은 내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새벽 운동복을 입은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인 ‘검은 9월단’ 단원 8명이 선수촌에 침입해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던 숙소를 습격했다.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이들은 선수 2명을 사살한 뒤 9명을 인질로 잡아 두고 이스라엘에 억류돼 있는 팔레스타인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검은 9월단’은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가운데 가장 과격한 무장 조직으로 1970년 6월 미국이 주도한 평화 협상에 이집트와 요르단 등이 참여하려는 자세를 보이자 이에 항의하며 요르단을 발판으로 항공기 납치 투쟁 등을 벌였다. 이들은 뮌헨 참사 이후에도 이해 12월 주 태국 이스라엘 대사관을 습격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일삼았다. 

테러 집단의 급습을 받자 에이버리 브런디지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오전 5시 30분께 서독 관리들에게 “무장 단체원들과 인질을 즉시 올림픽 지역 밖으로 내보내라”고 했지만 그의 말대로 될 일이 아니었다. 브런디지 위원장은 이날 오후 “모든 경기를 내일까지 중단하고 이번 사태로 숨진 이들의 추도식을 내일 오전에 갖는다”고 발표했다. 

이 사이 빌리 브란트 총리가 직접 협상에 나선 가운데 납치범과 인질들은 헬리콥터로 뮌헨 인근의 공군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협상이 결렬되며 총격전이 벌어져 인질 9명과 납치범 5명 그리고 경찰관 1명이 사망했다.   

9월 6일 8만여 명의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메인 스타디움에서 희생자를 위한 추도식이 거행됐다. 출전국 국기가 반기로 게양된 가운데 뮌헨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장송 행진곡을 연주해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대회를 중단하자는 일부 의견도 있었지만 브런디지 위원장은 “올림픽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중지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이스라엘 선수단은 동료들의 주검을 안고 슬픈 귀국길에 올랐다.

이 대회 수영 남자 자유형 100m와 200m, 접영 100m와 200m, 400m 계영, 800m 계영, 400m 혼계영에서 모두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7관왕에 오른 마크 스피츠는 선수단과 함께 폐회식에 참석하지 않고 곧바로 귀국했다. 스피츠가 7번째 금메달을 딴 다음날 ‘검은 9월단’사건이 터졌는데 스피츠는 유태계 미국인이었다.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대한체육회는 멕시코시티 대회에 이어 다시 한번 6위 이내 입상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 및 선수 위주로 소수 정예 선수단을  꾸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1차적으로 확정된 선수단은 여자 배구와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등 5개 종목에 39명(임원 13명, 선수 26명)이었다. 이는 1952년 헬싱키 대회 때보다 4명이나 적은 역대 최소 규모였다. 그러나 7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중화민국(오늘날의 대만)을 3-0, 북한을 3-1로 꺾고 본선 티켓을 손에 넣은 남자 배구(임원 2명, 선수 12명)가 합류한 데 이어 서독 현지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던 육상의 박상수(남자 높이뛰기)와 백옥자(여자 포환던지기) 그리고 수영의 조오련과 사격 대표팀(임원 1명, 선수 5명)이 추가되면서 62명(임원 6명, 선수 46명)으로 선수단 규모가 늘었다. 

사격은 입상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사격연맹의 강력한 요청으로 선수단에 포함됐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소구경 복사에서 최충석이 60위, 트랩에서 김태석이 33위, 김남구가 41위 그리고 스키트에서 박도근이 44위, 박성태가 56위에 그쳤다. 효자 종목 복싱은 이 대회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라이트플라이급의 이석운 등 6명의 출전 선수 가운데 단 한 명도 8강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뒷날 프로 복싱 선수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라이트급의 김태호는 8강전에서 헝가리의 라시오 오르반에게 판정으로 져 탈락했다. 오르반은 이 체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했다.   

레슬링도 자유형 플라이급의 김영준, 밴텀급의 안재원, 라이트헤비급의 곽광웅, 그레코로만형 밴텀급의 안천영이 출전했지만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 역도 라이트급의 기대주 원신희는 합계 427.5kg으로 7위에 그쳤다. 

육상 남자 높이뛰기의 박상수는 2m로, 여자 포환던지기의 백옥자는 15m78로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박상수는 10위, 백옥자는 15위였다. 2년 전인 1970년 제 6회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2관왕인 수영의 조오련은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각각 4분 21초 78과 17분 29초 23으로 예선 탈락했다. 우승 기록과 400m에서는 21초 가까이, 1500m에서는 1분 30여초 뒤져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지역 예선에서 북한을 잡고 기세를 올린 남자 배구는 조별 리그 A조에서 폴란드를 3-1로 잡았으나 소련에 0-3으로 지는 등 2승 3패를 기록하며 순위 결정전으로 밀린 뒤 7위 결정전에서 브라질을 3-0으로 꺾었다. 배구가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 대회에서 9전 전패로 꼴찌를 한 데에서 한 발 나아간 성적이었다.

재일동포가 다시 한번 한국 스포츠의 체면을 살렸다. 오승립은 유도 80kg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해 한국 선수단에 유일한 메달을 안겼다. 8년 전 도쿄 올림픽에서 유도 첫 메달을 모국에 선사한 또 다른 재일동포 김의태는 도쿄 대회 80kg급에서 체급을 올려 93kg급과 무제한급에 출전했으나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63kg급의 한성철과 70kg급의 장인권도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때 정식 종목에서 탈락했다가 올림픽 무대에 복귀한 유도에서 일본은 5체급 가운데 3개의 금메달을 얻었으나 종목의 대표성을 지닌 무제한급에서 1964년 도쿄 대회의 안톤 헤싱크(네덜란드)에 이어 같은 나라의 빔 루스카가 다시 정상에 올라  머쓱하게 됐다.     

여름철 올림픽에 처음으로 등장한 북한은 사격과 여자 배구, 유도 등 10개 종목에 82명(임원 18명, 선수 64명)의 선수단이 출전했다. 첫 출전이었지만 성적은 좋았다. 사격 소구경 복사에서 이호준이 599점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2위인 미국의  빅터 아우어와 3위인 루마니아의 니콜라 로타루가 598점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치열한 경쟁 속에 얻은 금메달이었다. 복싱 라이트플라이급의 김우길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 배구는 3위결정전에서 한국을 3-0(15-7 15-9 15-9)으로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의 김광형과 유도 63kg급의 김용익은 동메달을 더했다.  

북한이 이 대회에서 거둔 성적(금 1, 은 1, 동 3)은 1980년 우방국인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 22회 올림픽에서 거둔 성적(은 3, 동 2)보다 앞서는 것으로 북한으로서는 의미 있는 결과였다. 북한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금메달 4개, 동메달 5개의 성적을 올릴 때까지 이 대회의 성적이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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