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클린스만은 토트넘 홋스퍼와 독일 대표팀을 이끈 전설적인 골잡이였지만 감독 클린스만은 정반대였다.
2004년 스스로 지휘봉을 내려놓은 펠러 감독 후임으로 독일 국가대표팀에서 감독 경력을 시작한 클린스만 감독은 2006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올랐다. 순위 결정전에서 포르투갈을 꺾고 3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감독으로 첫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 내며 독일 대표팀에서 장기 집권을 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돌연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클린스만의 다음 행선지는 세계 최고 구단 중 하나로 꼽히는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클린스만 감독은 바이에른 뮌헨에 부임한 뒤 유소년 발굴 채널을 확장하고 훈련장을 개선하며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바르셀로나에 져 탈락했고 부임 1년도 되지 않은 2009년 4월 분데스리가 5경기를 남겨두고 경질 통보를 받았다. 클린스만의 마지막 경기는 샬케 04전 0-1 패배. 바이에른 뮌헨의 순위는 분데스리가 3위였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클린스만 아래에서 뛰었던 독일 대표팀 전설 필립 람은 자서전에서 "클린스만 감독은 전술 지도가 없었다. 선수들이 킥오프 전에 만나 전략을 논의했다"고 폭로했다.
밥 브래들리 후임 감독을 물색하던 미국 축구협회는 클린스만 감독을 주목했다. 클린스만이 바이에른 뮌헨에서 남긴 실패 사례보다 선수 시절 명성을 주목해서인지 클린스만 감독을 미국 대표팀 35번째 감독으로 임명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2013년 7월 파나마를 1-0으로 꺾고 미국 대표팀을 골드컵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그해 9월엔 2014년 FIFA 브라질 월드컵 본선 진출까지 해냈다. 미국 대표팀은 클린스만 감독과 계약 기간을 2018년까지 늘리는 동시에 클린스만 감독에게 미국 축구 테크니컬 디렉터 역할까지 맡겼다. 재계약 발표 당시 미국 축구협회장 수닐 굴라티는 "지난 2년 동안 클린스만 감독은 성인 대표팀부터 유소년 대표팀까지 탄탄한 기반을 다졌고 우리는 그 성공을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클린스만 감독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국을 16강에 올려놓으며 호평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골드컵에서 자메이카와 4강전 패배로 명성이 깎였다.
게다가 대표팀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미국 출신 선수보다 유럽에서 제대로 출전 시간을 받지 못하는 '미국계' 선수들을 중용하거나,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보다 조기에 유럽에 진출하는 것을 독려하며 미국축구협회와 마찰을 빚었다.
내부적으로 단결에 실패한 '미국 클린스만호'는 2018년 FIFA 러시아 월드컵 북중미 최종 예선에서 탈락했다. 멕시코에 1-2로 진 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코스타리카에 0-4 대패가 치명적이었다. 미국 축구협회는 코스타리카와 경기가 끝나고 클린스만 감독에게 경질을 통보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위약금을 챙겨 미국 축구과 결별했다.
이후 클린스만 감독은 독일로 돌아가 헤르타BSC 지휘봉을 잡았는데, 이는 클린스만 감독에게 '흑역사'로 남게 됐다. 클린스만 감독은 2020년 2월 사임을 발표했는데 이를 자신의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 발표했다. 이후 구단 관계자들은 금시초문이었다며 하나같이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냈다. 그야말로 프로 구단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사건이었다. 오죽하면 클린스만 감독을 독일 축구 전설로 추앙하던 많은 이들도 이 사건으로 클린스만 감독에게 등을 돌렸다.
클린스만의 지도자 경력을 종합하면 '전술이 없고(필립 람 자서전)', '유럽이 아닌 자국 리그를 무시하며(미국 대표팀 시절), 갑작스럽게 지휘봉을 내려놓는 등 '독단적인 행동'(헤르타 베를린 감독 시절)을 하는 감독이다. 대한축구협회가 클린스만 감독에게 2026년 북중미 월드컵까지 지휘봉을 맡겼을 때 기대보다 우려가 컸던 것은 당연한 현실이었다.
한국 대표팀에서도 클린스만은 다르지 않았다. 벤투 감독 시절 철저한 빌드업 축구로 상대에 맞섰던 선수들은 자신들이 알아서 포지션을 바꾸는 등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새 얼굴을 찾기 위해 K리그 현장을 찾기보다는 손흥민과 김민재, 황희찬 등의 경기를 보러 유럽으로 떠났으며 아시안컵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ESPN 등 외신과 만나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 분석에 열을 올렸다. 부임 당시 "한국에 상주하겠다"는 약속은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견문을 넓히는 것 또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중요하다"며 "이게 내 근무 방식"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또 FIFA 랭킹 130위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후반 추가 시간 동점골을 허용했을 때 '피식' 웃었으며, 아시안컵 결과로 경질 여론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서며 몰린 인파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시안컵은 충격적이었다. 손흥민과 김민재 황희찬 그리고 이강인까지 유럽 빅리그를 누비고 있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대표팀은 '역대 최고 황금세대'라고 주목받았지만 전술 없는 감독 아래에선 오합지졸이었다. 조별리그에서 FIFA 랭킹 130위 말레이시아와 경기에서 3-3으로 비기는 등 조별리그에서 한 수 아래 팀들을 상대로 무려 6골을 내줬고, 16강전과 8강전을 더하면 5경기에서 8실점으로 기록이 늘어난다. 이는 4강 상대였던 요르단이 한국을 상대로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 후세인 아무타 요르단 감독은 4강전이 끝나고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능력이 있는 팀이다. 5경기에서 8골을 허용한 팀을 상대하게 됐으니 그 약점을 공략하기로 했다"며 "한국은 쉬운 상대가 아니지만 특정 영역에서 압박한 게 잘 먹혔다. 클린스만 감독은 좋은 지도자고 그와 한국 선수들을 존중하지만, 우리가 더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클린스만 감독에겐 '당당한 결과'였다. 클린스만 감독은 입국 이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사퇴 의사는 없다"며 "이런 감정적인 부분, 축구를 통해서 저희가 얻을 수 있는 희로애락은 축구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16강전, 호주와의 8강전에서는 저희가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아마 많은 분이 행복해하셨을 것이다. 반대로 대회에서 이렇게 패배를 안고 돌아오고 탈락하게 되면 (부정적인) 여론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더 부정적으로, 진짜 극단적인 발언들도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비판을 감수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게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팀이 옳은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은 미래를 이야기했다.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입국 당일 "다음주 전력강화위원회를 소집할 예정이다. 이 자리에 클린스만 감독의 참석 여부는 미정이지만, 조율하고 있다. 그 이후 출국 예정이다"라고 설명했는데, 클린스만 감독은 휴식을 위해 회의가 열리기 전 휴식을 위해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출국했다.
또 "(미국 자택으로 돌아가) 짧은 휴식을 취하고 유럽으로 넘어가서 이강인, 손흥민, 김민재 등 다른 선수들의 경기를 볼 것이다. 물론 빠르게 귀국해 태국과의 2연전을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비판 여론을 예상한 듯 "국가대표팀 감독은 많은 출장을 다녀야 하고 프로팀 감독과는 달라야 한다. 저희 일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들의 비판은 존중한다. 제 일하는 방식, 제가 생각하는 국가대표팀 감독의 그런 업무 방식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라고 강조했다.
ESPN은 클린스만 감독의 이유 모를 해외 출장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지난 8일 보도에서 "클린스만 감독이 단독으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니지만,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더 거슬리는 것은 그러한 움직임이 실제로 클린스만 감독의 성공 전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손흥민, 황희찬, 이강인과 같은 선수들의 부정할 수 없는 자질을 모두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현대 축구 시대에 유럽에 기반을 둔 선수의 경기 영상을 검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고 비판했다.
또한 "비록 손흥민이 몇 번의 좋지 못한 경기력을 보여주더라도, 클린스만이 가까이서 개인적으로 관찰하면서 자신의 팀에서 유일한 세계적 수준의 선수를 제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SPN 외에도 클린스만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세계 곳곳에서 나왔다. 영국 디애슬래틱은 "클린스만 감독의 감독 경력은 2006년 40세 나이에 독일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준결승전까지 이끈 이후 급격히 기울였다. 2016년 월드컵 예선에서 끔찍한 출발을 한 뒤 미국 대표팀을 떠났고 이후 헤르타 베를린에서 10주 감독 생활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클린스만 감독은 조별리그에서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3-3 무승부를 거둔 뒤 비난받았다"며 "솔직히 방금 일어난 일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고 비판했다.
또 요르단과 4강전을 두고 "클린스만 감독은 경기를 앞두고 주저하는 선수들에게 '긴장을 풀라'고 말했다. 선수들은 그의 조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수많은 패스 미스를 저질렀다. 중원에서 몇 번이고 공을 내줬다"고 복기했다.
그러면서 "요르단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였다. 더 나은 것(우승)은 토요일(결승전)에 나올 수도 있다"며 "역으로 파리생제르맹, 토트넘 홋스퍼, 바이에른 뮌헨, 울버햄턴 원더러스 등에 소속되어 있는 선수들이 있는 클린스만호의 최급 수십 년간 엄청난 재능을 고려한다면 (이날 패배는) 한국인들이 기억할 수 있는 최악의 순간 중 하나다. 요르단 선수들 대다수는 요르단 리그에서 뛸 수 있다"고 꼬집었다.
클린스만 감독을 향한 비판은 고국 독일에서도 있었다. 독일 베를린 매체 벨트(welt)는 "클린스만 감독은 한국에서 계속 힘든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대회 전에도 한국 대표팀에 부임하고 치른 5경기에서 이기지 못해 비판을 받았다.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도 환영받지 못했다"며 "팀은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웠다. 클린스만 감독을 향한 비판은 더욱 커질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국제적 여론과 달리 클린스만 감독은 실패를 되돌아보기보다 밝은 내일을 보장받은 듯한 자세였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만남을 떠올리며 "현지에서 두 차례 만남을 가졌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대회를 치르면서 저희가 봤던 긍정적인 얘기들도 많이 했다. 한 경기 한 경기 분석을 시작했다. 경기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눴다. 안 좋았던 점, 실점이 많았던 부분들은 분명히 저희가 보완해야 하는 부분이다"라며 3월 태국과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2연전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15일 열린 전력강화위원회에 클린스만 감독은 화상으로 참석했다. 마이클 뮐러 위원장을 중심으로 정재권(한양대 감독), 곽효범(인하대 교수), 김현태(대전하나 전력강화실장), 김영근(경남FC 스카우트), 송주희 위원(경주 한국수력원자력 감독)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전력강화위원회는 클린스만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위원회 후 황보관 기술본부장이 직접 브리핑에 나섰고 "2023 카타르 아시안컵 경기와 관련해 요르단과 준결승은 두 번이나 만나는 상대임에도 전술적 준비가 부족했다. 재임 기간 중 선수 선발과 관련해 감독이 직접 다양한 선수를 보고 발굴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는 의견이 있었다"라는 위원들의 지적을 소개했다.
또, "선수단 관리에 대해서는 팀 분위기나 내부 갈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지도자로서 팀 규율과 기준의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지적도 있었다. 국내 체류 기간이 적고 근무태도도 국민들을 무시하는 것 같다. 여러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고 회복하기에 불가능하다는 평가도 있었다"라며 냉랭한 분위기를 전했다. 이 때문에 클린스만이 더는 감독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있었다는 것이 황보 위원장의 소개였다.
미국 자택에 머무르고 있는 클린스만도 화상으로 위원회에 참석했다. 황보관 위원의 전언으로는 "선수단 중에 불화가 있었다. 그게 경기력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라며 주장 손흥민과 이강인 등이 섞여 벌어진 사건을 언급하며 선수 탓으로 돌렸다고 한다. 경기력 자체가 나빴다는 위원들의 지적에 대해서는 수긍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력강화위는 정관상 조언, 자문일 뿐 결정 기구가 아니다. 그래서 유명무실한 논의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클린스만은 "이런 기구가 있었다면 진즉 대화를 할 수 있었다"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이 역시 사후약방문이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은 16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오늘 임원 회의에서 어제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 내용을 보고 받아 의견을 모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한 끝에 대표팀 감독을 교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가대표팀 운영에 대한 협회 자문 기구인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가 전날 감독 교체를 건의함에 따라 소집된 이날 회의에서 임원들은 클린스만 감독과의 결별을 결정해 통보했다.
클린스만 감독과 남은 계약 기간은 2026년까지. 카타르 매체 알카스에 따르면 클린스만 감독의 연봉은 28억 원이다. 1년 만에 계약을 해지하게 된 것에 따른 위약금을 지불해야 하는데, 이에 따라 클린스만 감독에게만 수십 억을 지불하게 됐다. 여기에 클린스만 감독이 데려온 코치들에게 줘야 하는 위약금도 추가 지출이다.
비록 클린스만 감독은 세 번째 경질로 감독 커리어엔 흠집이 났지만 막대한 위약금을 챙겼다. 미국 대표팀에 이어 한국 대표팀까지 위약금으로만 '불로소득'을 챙겼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클린스만 감독은 정 회장이 경질을 발표하기 직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한국 축구대표팀 단체 사진과 함께 "모든 선수와 코칭스태프, 그리고 한국 축구 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카타르 아시안컵 준결승에 대한 모든 성원에 감사하다. 준결승전까지 13경기 연속 패하지 않은 12개월의 놀라운 여정이다. 계속 화이팅하자"고 적었다.
한국은 다음 달 21일과 26일 태국과 홈 앤드 어웨이로 2026 북중미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을 앞두고 있다. 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따라 태국과 경기는 외국인 감독보다 국내 감독에게 '임시로' 지휘봉을 맡기는 방안이 유력하다. 임시 감독으로는 황선홍 올림픽 대표팀 감독과 홍명보 울산 현대 감독, 김기동 FC 서울 감독 등이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국가대표 감독 선임 규정 제12조(감독 코치 등 선임) ②항은 협회는 '제1항(각급 대표팀 감독, 코치 및 트레이너 등은 '국가대표 지도자 선발기준'에 따라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 또는 기술발전위원회의 추천으로 이사회가 선임한다)에 선임된 자가 구단에 속해 있을 경우 당해 구단의 장에게 이를 통보하고 소속 구단의 장은 특별한 사요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임시 감독이 누가되든 출혈은 불가피하다. 황 감독은 4월 올림픽 예선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고 홍 감독과 김 감독 등 현직 K리그 감독들은 다음 달 리그 개막을 앞두고 있다. 현직 K리그 감독이 대표팀 감독이 된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해당 팀이 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