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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만에 이뤄지는 북한의 도쿄 올림픽 참가…단일팀 출전할 수 있을까

작성일: 2018.03.31 12:12 신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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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선전한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북한을 방문한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30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을 만났다고 AP통신이 평양발로 보도했다.

바흐 위원장은 AP통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 위원장이 2020년 도쿄 여름철 올림픽과 2022년 베이징 겨울철 올림픽에 북한 선수들이 출전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바흐 위원장은 북한올림픽위원회로부터 도쿄 올림픽과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아직은 원론적 수준이긴 하지만 2018년 평창 겨울철 올림픽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열리는 올림픽에 북한이 출전 의사를 밝힌 사실은 몇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불참 가능성이 있었던 평창 동계 대회에 극적으로 출전하면서 들쑥날쑥하던 북한의 올림픽 출전이 2020년대 초반까지 안정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1964년 인스부르크(오스트리아) 동계 대회와 1972년 뮌헨(당시 서독) 하계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첫선을 보인 북한은 이후 정치적·경제적·경기력 문제 등으로 여러 차례 올림픽에 나서지 못했다.

여름철 올림픽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미국) 대회와 1988년 서울 대회에 불참했고 겨울철 올림픽은 1968년 그르노블(프랑스) 대회를 비롯해 6차례나 출전하지 않았다.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에서 한필화가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 은메달을 따긴 했지만 이후 동계 종목 경기력이 세계 수준과 상당한 차이가 있어 2014년 소치(러시아) 대회에도 나서지 못했다.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도 이런 상황이 획기적으로 좋아질 것 같지는 않지만 IOC의 배려로 최소 규모의 선수단은 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북한은 이번 약속으로 여름철 올림픽 데뷔가 늦어진 실마리가 된 도쿄 올림픽에 반세기여 만에 나서게 된다. 북한 스포츠로서는 적지 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북한은 애초 19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그때 상황을 살펴본다.

도쿄 올림픽은 1964년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93개국 5천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출전 선수들은 19개 종목, 163개 세부 종목에서 기량을 겨뤘다. 유럽과 미국이 독점해 온 올림픽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대회였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딛고 부흥하는 일본을 돋보이게 한 대회였으며 주 경기장인 도쿄 국립경기장은 대회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도쿄는 1940년 제12회 대회를 유치했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대회가 취소된 전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 대회를 준비하는 데 들인 직간접 비용은 5억6,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 선수단은 올림픽 예선을 치러야 했던 농구를 비롯해 사격과 수영, 승마 등 4개 종목 선수 44명이 9월 18일 일찌감치 일본으로 갔다. 본진인 2진은 10월 초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북한 선수단이 일본에 조기 입국한다는 소식에 따라 9월 23일 서둘러 출국했다.

선수단은 하네다국제공항에서 재일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대회 기간 재일 동포들은 열과 성을 다해 모국의 선수단을 지원했다. 재일거류민단과 여러 한국인 단체가 중심이 돼 구성한 '도쿄 올림픽 한국인 후원회'는 전지훈련 뒷바라지부터 응원, 음식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선수들을 뒷바라지했다.

북한 선수단은 대회 개막을 닷새 앞둔 10월 5일 1진이 니가타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북한 선수단은 도착 사흘 만인 10월 8일 올림픽을 보이콧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 선수단이 보이콧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조선민주주의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대신 북한(North Korea)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국제육상경기연맹과 국제수영연맹 그리고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는 1963년 1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가네포(The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 신생국경기대회)에 출전한 선수는 IOC에 의해 12개월 동안 올림픽 참가 자격이 정지됐기 때문에 도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북한 선수 6명과 인도네시아 선수 11명은 대회 출전이 금지됐다. 대회 출전이 금지된 북한 선수 가운데에는 가네포 3관왕이자 당시 기준 400m와 800m의 세계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세계적인 육상 선수 신금단이 들어 있었다. 북한은 신금단이 출전하지 못하면 올림픽 출전에 따른 체제 선전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불참 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분단 된 나라들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느냐 하는 문제는 1960년대 국제 스포츠계의 골칫거리였다. 1968년 멕시코시티 하계 올림픽을 앞두고 이 문제가 또다시 터졌다. 대회 개막 직전 열린 IOC 총회에서 동독은 독일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대만은 자유중국으로,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고쳐 부르기로 결정하고 동독과 대만은 같은 해 11월 1일부터 시행하는 한편 북한은 다음 대회인 뮌헨 대회부터 시행하고 이 대회에서는 북한이라는 호칭으로 참가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에 불복한 북한은 이미 입촌해 있던 선수단을 빼내 돌아가 버렸다.

북한은 1969년 제68차 바르샤바 IOC 총회에서 국호인 DPRK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이후 올림픽을 비롯한 주요 국제 대회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했다. 불발에 그쳤던 반세기 전 도쿄 올림픽이 북한 스포츠에 어떤 의미인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관심사는 북한이 두 올림픽에 연속 출전을 약속한 가운데 한국과 북한 그리고 IOC가 남북한 단일팀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한국과 북한은 평창 동계 대회에서 올림픽에서는 처음으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을 꾸렸다. 여기서 주목할 내용이 있다. 반세기 전 도쿄 올림픽에는 동독과 서독이 독일 단일팀으로 출전했다. 당시 독일 단일팀(United Team of Germany)은 미국과 소련, 개최국 일본에 이어 종합 4위(금 10 은 22 동 18)를 차지했다.

육상 남자 10종 경기 우승자인 빌리 홀도프는 서독 선수, 여자 80m 허들 금메달리스트 카린 발처는 동독 선수였다. 사이클 단체 추발 금메달 멤버는 전원 서독 선수였다. 다이빙 여자 스프링보드 3m 챔피언 잉그리드 크뢰머는 동독 선수였다.

1956년 멜버른(호주) 하계 올림픽과 1960년 로마(이탈리아) 하계 올림픽에도 단일팀으로 출전한 독일은 두 대회에서 각각 7위와 4위 올랐다. 독일 단일팀은 겨울철 올림픽에도 3차례 나섰는데 1956년 코르티나 담페초(이탈리아)대회에서 9위, 1960년 스쿼밸리(미국) 대회에서 2위,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에서 6위를 기록했다.

통일이 이뤄진 독일은 1992년 알베르빌(프랑스) 동계 대회에서 1위, 같은 해 바르셀로나(스페인) 하계 대회에서 3위에 랭크됐다. 통일된 힘은 이렇게 나타났다.

남북 스포츠 교류는 정치적으로 민감해 2년 뒤 7월,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정세가 남북 단일팀 성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단일팀, 나아가 ‘통일팀’의 성공적 사례는 독일이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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