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내가 죽던 날' 박지완 감독. 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괜찮은 줄 알았던 삶이 무너져버렸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어디서 기댈 곳을 찾아야 할까.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서로 무관했던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마음을 주고받는 이야기다. 타인과의 만남이 두렵고 모든 게 스산하게만 다가오는 요즈음, 그래서 더 마음을 치는 이야기다. 고요하게 다가와 휘몰아치는 드라마를 직접 쓰고 연출한 이는 신예 박지완 감독. 영화사봄을 거쳐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다시 현장에 몸담으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써왔던 그녀가 '내가 죽던 날'의 이야기를 시작한 건 무려 7년 전.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를 비롯해 믿음직한 배우들과 지난했던 여정을 함께 겪어온 신예 감독은 겸손하게도 모든 공을 함께해온 이들에게 돌렸다.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다시 스크린에서 보길 희망하며, 박지완 감독과의 일문일답을 옮겨본다.

-어떻게 출발한 이야기인가.

"이 시나리오를 쓴 지는 좀 됐다. 2013년. 초고. 처음 줄거리는 그대로였다. 엔딩도 그대로, 현수 순천댁 세진의 캐릭터도 있었다.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없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만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완전 남에게 영향을 받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주인공 현수가 형사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직업이 흔하지 않은데, 형사는 다 벌어진 다음에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사람이라 냉정하게 보게 된다. 비이성적인 결정을 하거나 이런 걸 감안해주지 않고 원인과 결과, 행동과 결과를 볼 것이다. 현수도 유능한 형사니까 그렇게 했을 텐데 본인이 일을 겪고 세진을 보게 되니 다르게 보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현수만이 아는 감정의 변화다. '그런 변화가 있는 인물을 해보고 싶다' 정도로 시작했다."

-긴 시간동안 큰 변화가 없었나.

사실 영화가 잔인하고 슬픈 게 만들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알기엔 그 기회가 적고 내가 어떤지 알기 위해서 오래 준비를 해야 하고 그 과정을 버티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서 계속 감독이 되고 싶다기보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단편도 하고 다른 영화 참여도 했다. 그 시절 제가 재미있는 것을 좇게 된다. 2013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만들었지만 제 컴퓨터에서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조금씩 바뀌어갔다. 시류라는 게 있다. 이게 보는 사람의 욕망이 투영되기 쉬운 시나리오더라. 세진 아빠 부분을 키워서 범죄물로 가자, 현수의 비극을 세게 하자 했지만 애초부터 가고싶은 곳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2018년 스토리퐁 권남진 PD를 만났는데 똑같이 봐주셨다. 그래서 부담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스카10 장진승 대표님도 똑같이 이야기를 해주셨고, 영화가 본격화됐다. 영화화되기에 지간이 필요하히라는 예감은 있었다. 시효가 지나면 보내줘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정말 운좋게도 동의해주시는 제작자를 만나 생각했던 걸 유지하면서 만들었다. 배우조차 동의하고 이걸 구현해줬다. 주변에서도 운이 좋다고 한다. 그렇게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신인감독인 제가 제일 초짜인데도 많이 기다려주시고 배려해 주셨다."

-김혜수는 '내가 죽던 날'이란 제목이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했다. 강렬환 제목인데 어떻게 지었나. 처음부터 이 제목이었나.

"너무 너무 오래돼서 생각이 안 난다. 어느 시점에 그 제목을 붙였다. 기준은 세진이다. 죽은 날도 아니고 다시 태어난 날, 다시 살아가야 하는 날. 그런 날이 세진에게 있고 그런 세진이를 들여다보니 현수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 기점으로 두 사람이 만난다는 생각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이 제목이 어두워서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행히 혜수 선배님이 좋아하시고 좋게 생각하는 분이 계셔셔 가져갈 수 있었다."

-김혜수가 문을 열고 닫는다. 분량 또한 압도적이다. 캐릭터 강한 연기를 주로 해왔던 김혜수에게 어떻게 이 시나리오를 건넸나.

"선 굵은 캐릭터를 많이 하셨지만 선하고 슬픈 눈, 섬세한 선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굵은 걸 잘하시고 강렬하게 남아있어서 현수같은 혜수 선배를 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해주실 거라고는 생각을 안했다. 사실 감히 배우들을 집어넣고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았다. 구체화 됐을 때 권남경 PD님이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쓰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했는데, 혜수 선배을 떠올리니 생각보다 잘 써졌다. 또 영민하고 유능한 형사였을 것 같은, 이 사람의 것들이 잘 겹쳐 보였다. 선배님이 한 현수가 굉장히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너무 다행히 비슷한 점을 읽어 주셨다."

-제안하고 금방 답을 받았나.

"그랬다. '안할텐데, 나는 그 사람이 읽는 게 의미가 있으니까 주자. 거절당하더라도 1번에게 거절당하고 싶다. 거절하더라도 한마디라도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생각보다 답이 빨리 와서 뵈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만났다고 하시더라. 거절하신다 한들 어떤 피드백이라도 받겠다는 마음으로 갔다. 선배님이 굉장히 정확하게 보셨다. 제가 생각한 지점을 보시고 그게 좋다고 해주셔서 그 날은 헤어졌다. 아마 그 날 오전에 보고 저녁에 답이 왔을 것이다. 멍했다."

-영화 속 이야기가 김혜수 개인에 맞닿는 바가 있었다고 하더라. 영화에서 언급되는 악몽이 본인의 경험이라고 해서 놀랐다.

"김혜수 선배 정도 스타가 굴곡이 없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촬영 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인이 되게 힘들었을 때 꿈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놀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가만히 있었다. 무례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너무 슬퍼서 울었다. 왜 선배님이 왜 이 영화를 하는지 알겠다는 마음이었다. 민정(김선영)과 만나는 신을 만들면서 입에 맞게 대화를 고치는데, 이야기가 강렬하니까 제작진은 넣고 싶어했다. 개인적으로는 김혜수 선배님이 출연하긴 했지만 그 인생을 가져다 내 영화에 쓰는 것이 맞는 일인가, 괜찮은 건가 고민이 엄청 됐다. 대인배시고 애정이 있어서 이야기하셨지만 기쁜 일이 아닌데 괜찮은지, 후에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 이게 연출자의 태도로 맞는지, 쓸거면 잘 찍어야 할 텐데…. 그러러다보니 이미 촬영이었다. 잠시 편집에서 빠진 적도 있다. 그래도 넣게 된 것은 김혜수 선배가 이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 태도와 그 장면이 맞닿아 있다는 결론을 내려서다. 여전히 조심스럽다. 선배님도 뭔가를 흘려보내고 싶으신 걸까 짐작만 했다. 연출자로서는 2019년의 김혜수를 잘 담아내는 것도 목표 중의 하나였다. 영화로 보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 영화 '내가 죽던 날' 박지완 감독. 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전반부에는 아픔과 절망이 진하게 녹아 있다. 개인의 경험이 반영됐나.

"제 경험이었다면 냉정하게 쓰지 못했을 것 같다. 오히려 상상해서 써서 더 자유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의 경험, 인생이 당연히 묻어나기는 하지만 경험에서 가져온 것이라면 못햇을 것 같다. 있을 법한 일을 더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데 공을 들였다고 해야 할까."

-사건의 진실과 결말에 이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설계한 이유가 있다면

"익숙한 장르, 장치를 통해 흘러가지만 도착하고 나면 조금 다른 곳에 있는 영화다. 거기에 도착했을 때 관객들이 너무 이상한 곳에 왔다고 느끼도록 설계해야 한다고 봤다. 사실 현수를 따라가야 하는 영화다. 현수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을 겪어서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빨리 보여주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배우에겐 너무 어려운데, 태도로 보여줘야 하는 거다. 현수가 겪은 일이 분명하게 안 나온다. 현수의 태도·표정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고 따라가야만 하는 이야기고, 현수조차도 보통 때와 다르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질문하지 않아야 할 것을 질문하고 안보였던 것이 보여서 질문하고, 그런 묘하게 바뀌는 과정을 따라가야 이야기기 자체가 설립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지도로 따진다면 익숙한 지점을 이정표로 사용하되 그 다음을 보시라고 인도하는. 그래서 그 다음이 다르게 보이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신이 시작할 때 시작한 의문이 그 신이 끝날때 풀리는 영화가 많다. 저희는 '잠깐만요 다음에 갈게요' 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태생이 그러하다는 동의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캐스팅이 더 중요했을 것 같다. 이정은 노정의는 물론이고 김선영 문정희 김정영 이상엽 조한철 김태훈 등 곳곳에 비중과 상관없이 묵직한 배우들이 자리했다.

"그것 역시도 김혜수 선배에게 기댄 바가 많다. 김혜수란 배우와 함께 해보고 싶으시다는 거다. '기생충' 개봉하고 '저 분 어디까지 가실거지' 할때 이정은이란 배우가 하겠다고 하시면서 순천댁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반전으로 쓰일까봐 걱정되는 반면 이정은이 나오는데 뭐라도 하겠지 식의 힌트가 아닐까 고민도 했다. 순천댁의 의문이 많은데 이정은이라는 배우가 연기력으로 표정으로 많이 커버해 주셨다. 이상엽 문정희 김선영 모두 그랬다. 특히 김선영 선배는 연락드린 다음날 바로 연락이 왔다. 시나리오도 좋다 하셨지만 사실은 김혜수 선배랑 연기하고 싶다는 게 주요했다. 그리고 진짜 친구가 됐다. 문정희 선배는 제일 의외였던 분이다. 격려에 가까운 답이었다. 너무 감사하다. 사실 겁이 났다. 더 빨리 뭔가를 해서, 더 오래 영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망까지 들 정도다.

현수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1대1로 만난다. 관객들이 모르는 얼굴이 유리한 적도 있고, 짧지만 확 집중시켜야 하는 역할도 있는데 너무나 운좋게 그런 배우들이 해주신 것이다."

▲ 영화 '내가 죽던 날' 박지완 감독. 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
-이정은이 소리를 내는 대목은 영화의 메시지 자체다. '네가 남았다. 네가 너를 구해야지.' 강렬하지만 사려깊은 조언이다

"직접적인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했다. 너무 노골적인 것은 아닐까. 후시녹음만 7시간, 두 번을 했다. 자막도 엄청나게 스트레스였다. 처음에는 자막을 안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중요한 메시지니까. 못 들은 관객을 버리고 가는 게 맞을까 싶더라. 저한테 중요한 건 순천댁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에 중점을 둔게 지금의 버전이다. 말보다 자막이 조금 늦게 나온다. 그 말을 하는 순천댁의 표정을 보는 것이 내용보다 중요하다. 내용도 중요하지만."

-김혜수와 이정은이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둘 모두 말도 없이 눈물을 펑청 쏟았다더라. 완성된 영화에는 되려 담담하게 담겼다.

"저는 더 낮춰달라고 했다. '아는데 안 멈춰' '안 멈춰서 그래요' 하시고, 기다리고 진정을 하고 촬영했다. 우리는 눈물이 많은 영화는 아니다. 눈물을 참는 사람이 나오는 영화다. 선배님도 그걸 맞춰 오셨는데 하다보면, 하다보니 눈물이 나는 거다. 이 배우가 이 장면을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지 않나. 저야 좋았지만 '우시면 안돼요. 낮춰주세요' 하곤 했다."

-두 선배 사이에서 노정의가 맡은 세진의 분량이 상당하다. 또래답게 연기도 자연스럽게 했고.

"또래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역배우들이 다들 아주 잘했는데, 세진이 같은 사람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의는 가만히 있을 때는 서늘한 표정이, 활짝 웃을 때는 화사함이 있다. 그 차이가 세진이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도 우리 영화를 찍을 때 기라성같은 선배들 사이에서 정의는 드라마도 찍고 입시도 다니고 학교도 열심히 갔다. 정말 안 괜찮아 보여서 괜찮냐고 물어보면 방긋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곤 했다. 그게 우리 영화 속 세진이랑 비슷해 보였다.. '뭘 하려고 하지 말라'고, '너 그대로 해도 될 것 같으니까, 열연하지 않고 지금 19살의 노정의를 살짝만 바꿔서 보이면 너는 세진이야'라고 했다. 그걸 영민하게 알아들어서 해줬다. 분량도 많은데 노련하다. 스크립터가 연결을 볼 게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가슴슴도 아팠다. 저는 좋지만 이게 10년은 단련해 온 거구나, 정의는 힘들었을 수 있겠다고. 그땐 말을 못했는데 나중에 '니가 너무 세진이 같았다'고 이야기했다."

-공개 직후부터 여성서사라는 평가가 이어진다. 여자라서 가능한 이야기까지는 아니라 해도 여성 캐릭터, 그들의 연대가 돋보인다.

"여자가 많이 나오고 여성 영화로 받아들여진다는 걸 늦게 깨달았더라. 제작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알았다. 저는 사실 캐릭터에 맞는 성별을 만든 건데 그렇게 볼 수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읽혀지는 것도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걸로 했다. 다만 그저 여성서사라고만 하면 뭔가 납작해지는 지점이 있다. 그런 수식어를 투자 이런 부분에서 좋아하시지 않더라."

▲ 영화 '내가 죽던 날' 박지완 감독. 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
-첫 영화를 만들어보니 얼른 다음 작품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지.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들이랑 또 일하고 싶은데 잘하지 않으면 할 수 없겠다구나. 내가 나를 냉정하게 보지 않으면 다시 할 수 없는 일이겠구나. 남들에게 내가 영화를 하고 있다는 말조차 많이 못했다. 집에서만 하고 있지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니어서. 영화를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려면 얼마나 자주 많이 만들어야 할까, 그러려면 잘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더 냉정하게 들었다. 이 영화의 관객이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부디 잘 봐주셔서 다음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관객과 만나는 마음은 어떤가.

"걱정이 많다. 너무 궁금하다 어떻게 보실지. 저야 많은 의도를 넣어서 두 시간을 채웠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관객이고, 그것을 얼마나 알아보실지,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다. 이렇게 관객이 귀한 때가 없지 않나. 내 인생과 관계없는 사람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아 그것이 관객이구나, 한대로 돌려받는구나' 생각이 든다. 돈이 안 아깝고 시간이 안 아까운 경험이길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스포티비뉴스=김현록 기자 roky@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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