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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스포츠 뒤집기] 한국 스포츠 종목별 발전사-농구(8)

작성일: 2016.04.03 07:0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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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한 선수들이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환영 행사에 참석했다. 맨 오른쪽이 박신자 ⓒ한국 농구 100년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그리고 1년여 뒤인 1970년 12월, 역시 방콕에서 열린 제 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영기가 이끄는 남자 농구 대표팀은 조별 리그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강호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서울에서 열기로 돼 있다 재정 문제로 반납한 이 대회에서 농구와 축구가 동반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 온 나라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두 대회 사이에 한국 농구사에 오래도록 남을 또 하나의 기록이 수립됐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 6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1위를 기록했는데 이 성적은 2016년 현재 세계남자선수권대회 최고 순위다. 이 3차례 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의 지휘관이 김영기다. <7편에서 계속>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동안 9차례 대회를 치른 박정희장군배쟁탈동남아여자농구대회는 한국과 일본,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의 단일팀이 출전한 대회였지만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국제 대회인데다 한일 라이벌 의식과 한국은행과 상업은행, 제일은행, 조흥은행 등 국내 금융권 팀들의 경쟁으로 아시아 여자 농구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972년 대회는 당시 복잡한 동북아시아 외교 문제로 유산됐다. 

한국과 일본은 동아시아 나라인데 대회 이름에 동남아가 들어간 게 특이하다. 그 무렵 아시아경기대회가 자카르타(1962년, 인도네시아), 방콕(1966년 1970년, 태국) 등지에서 열리고 지역 친선 축구 대회인 메르데카배와 킹스컵이 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 방콕 등지에서 개최되는 등 동남아시아가 아시아 스포츠의 중심이 되고 있었던 상황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대회가 열리는 장충체육관은 대회마다 연일 만원 관중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여자 농구 전성기였다. 

이런 가운데 상업은행 단일팀이 1964년 4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제 4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8위를 기록했다. 상업은행은 그 무렵 슈퍼스타 박신자를 영입한데 이어 한국은행과 치열한 라이벌전을 펼치며 경기력을 크게 끌어올렸다. 13개 나라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당시 여자 농구 세계 최강 소련이 우승한 가운데 체코슬로바키아와 불가리아가 2, 3위를 차지했고 미국은 4위, 일본은 9위에 그쳤다. 

1953년 제 1회 대회가 열린 이후 한국과 일본은 처음으로 이 대회에 출전했는데 이에 앞서 북한은 1959년 소련에서 벌어진 제 3회 대회에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나섰지만 소련에 24-89로 지는 등 7전 전패로 출전 8개국 가운데 꼴찌를 했다. 북한은 이 대회가 2016년 현재 처음이자 마지막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출전이다. 

한국은 조별 리그에서 아르헨티나를 87-58로 꺾었으나 체코슬로바키아에 연장 접전 끝에 72-77, 유고슬라비아에 57-60으로 져 8~13위 결정전으로 밀려난 뒤 파라과이를 73-49, 일본을 70-61, 칠레를 68-45, 아르헨티나를 82-59로 물리쳤다. 

박신자와 김명자, 나정선, 신항대 등으로 이뤄진 상업은행은 대회를 마친 뒤 브라질과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에서 친선경기를 가지며 한국전쟁으로만 알려져 있던 ‘꼬레아’의 이미지를 새롭게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수준이던 때 일이다. 

제 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는 1967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렸다. 직전 대회에 상업은행 단일팀이 출전해 준우승국인 체코슬로바키아에 연장 접전 끝에 지는 등 가능성을 확인한 한국은 이 대회에는 박신자와 김명자, 신항대, 김추자, 주희봉, 채현애 등 당시 국내 여자 농구의 중심인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국민은행의 우수 선수를 모두 모아 명실상부한 국가 대표팀을 꾸렸다. 미 수교국이자 사회주의 국가에서 열리는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한 종목이 여자 농구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대회였다. 


▲ 1967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한 선수들의 환영 카퍼레이드. 서울시청 앞을 지나가고 있다. ⓒ한국 농구 100년

한국은 조별 리그 B조에서 이탈리아를 76-56, 개최국 체코슬로바키아를 67-66으로 누르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결승 리그에서는 소련에만 50-83으로 졌을 뿐 동독을 64-59, 일본을 81-60, 유고슬라비아를 78-71로 꺾고 준우승하는 쾌거를 이뤘다. 박신자는 준우승팀 선수로는 이례적으로 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혀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1959년 서독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제 2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은메달에 이어 한국 스포츠 사상 두 번째로 단체 종목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을 차지해 농구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농구 올드 팬들은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선수단이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한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 대회에 이어 8월 도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여자 농구에서 한국은 프랑스와 일본을 가볍게 제치고 우승했다.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북한의 호칭 문제 등 대회 운영에 불만을 품고 출전을 거부해 반쪽 대회가 되긴 했지만 한국 여자 농구가 거둔 세계 규모 대회 첫 우승이었다. 

이듬해인 1968년 7월 대만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해 서울에서 열린 제1회 대회에 이어 2연속 우승하는 등 그 무렵 한국 여자 농구는 아시아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9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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