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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사격, 한때는 천덕꾸러기…이제는 부동의 효자 종목

작성일: 2016.08.11 07:32 신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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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종오는 1988년 서울 대회에서 차영철이 은메달을 차지한 이후 올림픽 사격에서 최고 성적(금 4, 은 2)을 올린 선수가 됐다.
[스포티비뉴스 올림픽특별취재팀=신명철 편집국장] 드디어 사격에서 금메달 총성이 울렸다.

진종오는 11일(한국 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슈팅 센터에서 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사격 남자 50m 권총 결선에서 193.7점으로 금메달을 땄다. 2008년 베이징 대회와 2012년 런던 대회 50m 권총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진종오는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명중하면서 올림픽 사격 사상 처음으로 3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사격은 1988년 서울 대회 이후 1996년 애틀랜타 대회만 빼고 2016년 리우 대회까지 한국 선수단에 계속 메달을 안기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빼놓을 수 없는 효자 효녀 종목이 됐다. 그러나 이런 위치에 오르기까지 사격은 고난의 길을 걸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보름 여 앞둔 그해 7월 3일 서울 시민회관 별관(오늘날의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열린 결단식 분위기는 무거웠다. 김택수 대한체육회장은 “(1972년) 뮌헨 대회 때는 회장을 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임감이 덜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어떻게든지 좋은 성적을 내야 할 텐데 걱정이다”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북한은 1964년 도쿄 대회와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에서 호칭 문제를 트집 잡아 잇따라 보이콧 소동을 벌인 끝에 1972년 뮌헨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북한은 겨울철 올림픽에서는 1964년 인스부르크 대회에서 한필화가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에서 은메달을 딴 터였다.

여름철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북한은 사격과 여자 배구, 유도 등 10개 종목에 82명(임원 18명, 선수 64명)의 적지 않은 선수단을 보냈다. 첫 출전이었지만 성적이 좋았다. 사격 50m 소총 복사에서 이호준은 599점(600점 만점)의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2위인 미국의 빅터 아우어와 3위인 루마니아의 니콜라 로타루가 598점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치열한 경쟁 속에 얻은 금메달이었다. 이호준은 기자회견에서 “적의 심장을 쏘는 총을 쏘는 자세로 사격을 했다”고 말했다.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말이기도 했고 한국 사격 관계자들에게는 비수와 같았다.

복싱 라이트플라이급 김우길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 배구는 3위 결정전에서 한국을 3-0(15-7 15-9 15-9)으로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 김광형과 유도 63kg급 김용익은 동메달을 더했다. 북한이 이 대회에서 거둔 성적(금 1, 은 1, 동 3)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금메달 4개, 동메달 5개의 성적을 올릴 때까지 가장 좋았다.

한국은 재일동포 오승립이 유도 80kg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해 한국 선수단에 유일한 메달을 안겼다. 전체 성적에서도 밀렸지만 ‘국방 종목’이기도 한 사격에서 1945년 해방 이후 첫 금메달을 북한이 차지한 것은, 남북이 치열하게 체제 경쟁을 하던 그때 큰 충격이었다.

입상 가능한 종목을 중심으로 소수 정예 선수단을 꾸리던 시절, 뮌헨 올림픽 출전 한국 선수단도 그렇게 구성했다. 그러나 사격은 예외였다. 입상 가능성이 높지 않았지만 대한사격연맹의 강력한 요청으로 선수단에 포함됐고 성적은 좋지 않았다. 출전 선수 대부분이 30위권 밖에 머물렀다. 1956년 멜버른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한 뒤 이 대회까지 꾸준히 올림픽 메달에 도전했지만 세계 수준의 높은 벽을 실감할 뿐이었다.

다음 대회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도 사격은 여전히 국제 경쟁력이 높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1978년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세계사격선수권대회 개최국으로서 위상을 고려해 뮌헨 대회에 이어 또다시 참가하게 됐다. 한국 선수단이 금메달 1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북한(금 1 은 1)을 제치고 선전한 가운데 사격은 1970년대 간판 선수인 박종길이 25m 권총에서 공동 15위를 차지한 게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1970년대 아시아 무대 권총 종목에서 박종길과 경쟁했던 북한의 서길산도 공동 15위였다. 뮌헨 대회 금메달리스트인 이호준은 50m 소총 3자세에서 6위에 올랐다. 남북 모두 메달은 없었지만 한국 사격은 다시 한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사격이 발전의 발판을 마련한 건 1978년 태릉에서 열린 제 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였다. 태권도를 뺀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이 개최한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박종길은 센터파이어 권총에서, 서장운은 소총 소구경 3자세에서, 박남순 김영순 유주희는 여자 10m 공기소총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명중했다.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첫 메달이었다.

이 대회서 자신감을 얻은 한국은 1988년 서울 대회에서 차영철이 남자 50m 소총 복사에서 은메달을 차지하며 올림픽 사격 메달의 물꼬를 텄다. 아시아 무대에서는 선전했지만 국제 대회에만 나가면 주눅이 들고 무리하게 올림픽에 가겠다고 해 체육 관계자들의 눈총을 받던 사격이 드디어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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