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8년 서울 대회에서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초대 챔피언에 오른 유남규.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88년 제24회 서울 여름철 올림픽은 한국 스포츠의 메달 종목 다변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대회라는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한국이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1988년 서울 대회 전까지 참가한 9차례 여름철 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은 역도 복싱 레슬링 유도 양궁 등 개인 종목과 구기 종목인 배구 농구 핸드볼 등 몇몇 종목에 한정돼 있었다.

이들 종목 가운데 양궁과 농구, 핸드볼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때 메달이 나온 것이고 1970년대까지는 ‘격투기 3총사’인 복식 유도 레슬링에 메달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격투기 3총사’도 늘 성적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복싱은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지용주(은메달)와 장규철(동메달)을 끝으로 로스앤젤레스 대회 전까지 메달이 끊겼다. 레슬링은 1964년 도쿄 대회 장창선(은메달)이 유일했다. 유도는 1964년 도쿄 대회 김의태(동메달), 1972년 뮌헨 대회 오승립(은메달),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장은경(은메달)이 꾸준히 메달을 이어 갔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비록 ‘반쪽 대회’였지만 한국 스포츠의 당면 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메달 종목 다변화의 물꼬를 튼 대회로 기록된다.

이는 1981년 9월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서울이 제24회 여름철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 이후 대대적으로 펼쳐진 종목별 꿈나무 발굴 사업과 경기 단체별 경기력 향상 계획이 맞아떨어진 1차적 결과물이기도 하다.

울 올림픽에서는 이 대회 이전에 한국이 세계선수권대회를 비롯한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올리고 있던 탁구가 정식 종목으로 진입한 것도 메달 종목 다변화에 일정 수준 도움이 됐다.

한국은 서울 올림픽에서 양궁 복싱 핸드볼 유도 탁구 레슬링 필드하키 사격 체조 역도 등 10개 종목에서 메달을 수확했다. 이를 대회 톱 5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종합 1위인 소련은 육상 복싱 카누 사이클 펜싱 축구 체조 핸드볼 사격 수영 유도 요트 양궁 농구 핸드볼 조정 수구 등 17개 종목에서 메달을 거둬들였다.

2위인 동독은 육상 복싱 카누 사이클 체조 조정 사격 수영 역도 요트 펜싱 유도 등 12개 종목에서 메달을 거머쥐었다. 3위인 미국은 육상 복싱 카누 다이빙 요트 수영 테니스 배구 레슬링 양궁 승마 조정 사격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농구 사이클 유도 등 17개 종목에서 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 1988년 서울 올림픽 복싱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김광선(가운데)은 그때 현역 군인이었다. 김광선은 태극기가 게양될 때 거수경례를 했다. ⓒ대한체육회 90년사

4위인 한국은 이들 나라보다 메달 종목이 적지만 서울 대회 이후 올림픽에서 이뤄진 메달 확장성을 보면 이들 이들 나라에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그와 같은 계기를 만든 게 서울 올림픽이다.

서울 올림픽에서 아시아 3강인 중국과 일본의 메달 종목을 보면 한국 스포츠의 다양성과 저변을 한눈에 알 수 있다. 11위인 중국은 다이빙 탁구 체조 사격 수영 역도 조정 배구 체조 등 9개 종목, 14위인 일본은 유도 수영 레슬링 사격 체조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등 7개 종목에서 메달을 기록했다.

서울 올림픽에서 나타난 메달 종목 다변화와 확장성에 대해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대회 이후 1990년대와 2000년대 한국 스포츠의 발전 과정이 이해된다.

먼저 격투기 3총사다. 레슬링과 유도, 복싱은 서울 올림픽 이전 효자 종목으로 한몫했지만 세계 수준에서 보면 그리 뛰어난 성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복싱은 한국이 태극기를 들고 처음 출전한 여름철 올림픽인 1948년 런던 대회 메달 종목이긴 하지만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전에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낳지 못했다. 복싱은 서울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과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처음으로 실질적인 효자 노릇을 했다.

복싱은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서 12개 전 체급 금메달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서울 올림픽 호성적을 예고했다. 서울 올림픽 이후 ‘3D’ 종목 회피 현상에 따른 침체를 겪고 있지만 복싱은 한국 스포츠가 힘들었던 시절 국제 대회 메달 맥을 이어 준 종목으로 칭찬 받을 만하다.

유도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호성적(금 2 은 2 동1)에 이어 1985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금 2 은 2)와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금 6 은 1 동 1)에서도 뛰어난 경기력을 발휘해 서울 올림픽 성적(금 2 동 1)이 홈 매트의 이점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국 올림픽 출전 사상 첫 금메달(1976년 몬트리올 대회) 종목인 레슬링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금 2 은 1 동 4)에서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에서 고르게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며 서울 대회에서 활약상(금 2 은 2 동 5)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유도와 레슬링은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국제 기구에도 꾸준히 진출해 경기 외 부문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종목 발전을 꾀할 수 있었다. 두 종목은 서울 올림픽을 발판 삼아 30여년이 지난 2010년대 후반에도 세계적인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7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여자 개인전 금메달리스트이자 1979년 서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인 김진호가 불을 붙인 한국 양궁의 상승세는 서울 올림픽에서 활활 타올랐다. 직전 대회인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부 개인전에서 고교생 서향순이 금메달, 김진호가 동메달을 따 든든한 징검다리를 놓았다.

서울 올림픽에서는 금메달 3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 등 모두 6개의 메달로 한국이 세계 4강에 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서울 대회에서 강력한 동력을 얻은 한국 양궁은 이후 올림픽에서 최고의 효자 효녀 종목으로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는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남녀 개인 및 단체전 전 세부 종목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서울 대회에서 올림픽 메달 종목 다양화에 발판을 놓은 종목으로 탁구를 빼놓을 수 없다. 1926년 제1회 세계선수권대회를 런던에서 연 탁구는 오랜 역사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종목이지만 서울 올림픽 때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남녀 단식과 남녀 복식 등 4개 세부 종목이 치러졌다.

한국은 탁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기 전에 이미 중국과 겨룰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로 꼽히며 세계선수권대회 등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서울 올림픽을 1년여 앞둔 1987년 뉴델리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양영자-현정화 조는 중국의 다이리리-리후이펀 조를 가볍게 제치고 금메달을 차지해 올림픽 탁구 여자 복식 초대 챔피언 자리를 예약했다.

남자는 여자에 견줘 세계 규모 대회에서는 크게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6년 서울 아시아아경기대회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며 서울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게 했다.

탁구는 올림픽 정식 종목 첫 대회인 서울 대회에서 4개 세부 종목 가운데 남자 단식(유남규)과 여자 복식 금메달 2개와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해 세계 최강 중국(금 2 은 2 동1)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개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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