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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출범 전 한국 실업 야구, 일본 아마추어 팀에 1-20으로 진 적도 있긴 하지만

작성일: 2018.12.06 12:15 신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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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회인 팀 고지마 야스아키는 지난달 26일 KBO 연합 팀과 경기에서 138구 17 탈삼진 으로 완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AWB 홈페이지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대만에서 열리고 있는, 교육 리그인 2018년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AWB)에서 KBO 연합 팀이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특히 일본 사회인 팀에 약세를 보여 3차례 겨뤄 1무 2패에 그쳤다.

5일 경기에서는 일본 사회인 팀에 4-11로 크게 졌다. 이날 일본 사회인 팀 선발투수는 지난달 29일 경기에 등판했던 가와노 류세이였는데 그 경기에서 가와노는 7이닝 2피안타 13탈삼진 1실점으로 KBO 연합 팀 타선을 틀어막았다. KBO 연합 팀은 가와노 류세이가 마운드에서 내려간 뒤 4점을 뽑아 5-5로 비겼다. 2-4로 진 지난달 26일 경기에서는 고지마 야스아키가 138구 17탈삼진으로 완투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5일 현재 KBO 연합 팀은 3승2무5패이고 일본 사회인 팀은 4승2무3패다. 교육 리그이긴 하지만 KBO 리그 수준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성적이고 경기 내용이다.

물론 일본 사회인 야구 수준은 결코 만만치 않다. 일본 사회인 야구를 직장인들이 펼치는 아마추어 종목으로 보면 오산이다.

해마다 도쿄돔에서 벌어지는 일본 사회인 야구의 최대 행사는 도시대항야구대회다. 일본야구연맹과 마이니치신문사가 함께 여는 이 대회는 1927년 첫 대회를 치렀고 올해 89번째 대회에서는 오사카시 대표인 도쿄가스가 우승했다.

대회 초창기 메이지 진구 구장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리던 대회는 1988년 이후 도쿄돔에서 펼쳐지고 있다.

올해 대회 1차 예선에는 북쪽 홋카이도부터 남쪽 오키나와까지 308개 팀이 출전했다. 이들은 4월과 5월 사이 1차 예선을 치렀고 5월과 6월 열린 2차 예선에서 108개 팀 가운데 본선에 나설 32개 팀을 가렸다.

도쿄도를 대표한 도쿄가스, 오사카시 대표인 NTT 서일본 그리고 이번 대회 본선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오사카시에 있는 일본생명, 가와사키시에 있는 도시바 등은 아시아선수권대회나 아시안게임 출전 일본 선수들 소속 팀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일본 사회인 야구 팀들이다.

이들 팀에서 뛰는 선수들은 고교와 대학에서 야구를 제대로 했고 지난해 우승 팀 도쿄도 대표 NTT 동일본의 주력 선수 후쿠다 슈헤이(20타수 11안타)는 올 시즌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295타수 78안타(타율 0.264)로 활약했다. 후쿠다 슈헤이는 일본이 우승한 2017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대만)에 출전했다.

이 대회 외에 또 하나의 전국 규모 대회인 사회인야구일본선수권대회(올해 44회)에서 활약한 선수들이 아시아선수권대회나 아시안게임 일본 대표 선수로 선발된다.

그렇다면 국내 프로 야구가 출범하기 전, 사실상 프로였던 한국 실업 야구는 일본 사회인 또는 대학 야구와 맞서 어떤 성적을 냈을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970년대까지 성적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1954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제1회 대회가 열린 이후 1975년까지 열린 11차례 대회에서 한국은 1963년, 1971년, 1975년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세 대회 모두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다.

1963년 대회에서는 재일 동포 출신 투수 신용균의 활약에 힘입은 바 컸고 1971년 대회에서는 작고한 김동엽 등 한국 심판진의 ‘애국 판정’이 2차 리그 역전 우승에 큰 힘이 됐다. 일본은 사회인 또는 대학 선발 팀이 출전해 이 기간 7차례 우승했다.

그리고 원로 야구인들에게는 되살리고 싶지 않은 일본 전 1-20 대패 기록이 이 기간에 나왔다. 잠시 1950년대로 가 본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1955년 또다시 마닐라에서 제2회 대회가 열렸다. 대회 기간에 열린 아시아야구연맹 총회는 선수권대회를 2년마다 열기로 하고, 1957년 대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올드 팬들이 기억하듯이 당시 서울운동장 야구장의 수용 규모는 7천 명 정도였고, 외야는 관중석이 없었다. 프로 야구 초창기 OB 베어스가 홈구장으로 쓴 대전 구장을 떠올리면 당시 서울운동장 야구장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허약하기만 했던 당시 정부의 재정은 야구장 증설 공사조차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1957년 5월 아시아야구연맹에 대회 반납을 통보했다.

그래서 제3회 대회는 1959년 도쿄에서 열렸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무리하게 서울에 유치했다 반납한 것과 같은 일이 1950년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한국이 반납하고 일본이 대신 치른 제3회 대회에서 한국은 아마추어에서만큼은 일본과 겨뤄 볼 만하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야 하는 충격적인 패배를 했다. 특히 1차 리그에서 당한 1-20 대패의 상처는 컸다. 이 경기에서는 주력 타자인 좌익수 박현식(프로 야구 삼미 슈퍼스타즈 초대 감독)이 마운드에 오르기도 했다.

이 무렵 일본 야구는 프로의 경우 1950년 단일 리그에서 센트럴·퍼시픽 양 리그로 분리 확대돼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시아선수권대회에는 사회인 야구 선발 팀과 와세다·게이오 등 도쿄 6개 대학 선발 팀이 번갈아 나오고 있었다. 한국은 실업 선발 팀이었지만 사실상 야구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들이어서 대패의 충격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2018년으로 다시 돌아와 한국 야구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대만에서 열리고 있는 AWB에서 나타난 경기력이 현주소라면 야구계로서는 대오 각성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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