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벌새' 포스터.

[스포티비뉴스=유지희 기자]열네 살 은희(박지후)는 엄마를 부르며 절박하게 문을 두드린다. 울부짖는 것처럼 한참을 두드려보지만 그곳은 은희의 집이 아니다. 잘못 찾은 집을 뒤로 하고 은희는 가족이 있는 진짜 집으로 담담히 들어간다. 뒷모습에는 뭔가 모를 씩씩함이 묻어난다. 영화 '벌새'(감독 김보라, 제작 에피파니·매스오너먼트)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은희로 희망을 그린다. 

1994년 서울 대치동에서 살아가는 은희의 일상은 오래된 필름처럼 익숙하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격렬하게 다투다가 다음날이면 곧바로 화해한다. 아빠(정인기)는 가끔 옷을 잘 차려입고 외도를 하는 듯 외출하고, 엄마(이승연)는 고단한 듯 방 한편에 모로 누워 낮잠에 들기도 한다. 오빠도, 언니도 마찬가지다. 공부 잘하는 오빠 대훈(손상연)은 때로 분에 못 이겨 주먹을 휘두른다. 소위 '날라리' 언니 수희(박수연)는 늦은 밤, 가족 몰래 화장이 얼룩진 얼굴로 집에 들어온다. 영화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호흡으로 누구나 겪었을 법한 그때 그 시절을 소환한다.

그랬던 은희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담임 선생님은 명문대에 가야 한다는 말을 구호처럼 외친다. 사귀던 남자친구 지완(정윤서)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다. 모든 걸 함께 나눴던 절친 지숙(박서윤)은 은희를 배신한다. "언니를 좋아해요"라고 수줍게 고백한 후배 유리(설혜인)는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라고 변심한다. 더구나, 의지했던 한문 선생임 

영지(김새벽)는 어느 순간부터 볼 수 없게 된다. 가끔 작은 일탈 정도 즐기던 평범한 열네 살 은희의 일상은 상처로 얼룩진다.

▲ 영화 '벌새' 스틸. 제공|엣나인필름

그 이후 은희의 모습은 예상을 조금씩 비껴간다. 고백한 아이에게 거절 당했을 때 멍한 듯 바닥을 한번 쳐다보지만, 곧바로 매섭게 눈을 흘긴다. 영지 선생님을 만날 수 없게 만든 원장 선생님에게는 소리치며 원망을 늘어놓는다. 가장 여린 존재로 상처에 휘둘릴 것 같았던 은희는 당차게 세상에 맞선다.

가족, 친구, 연인에게 흔들리며 상처 입은 은희는 그 시절을 지나간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래서 '벌새'는 개인적이면서 보편적 이야기다. 영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방식대로 씩씩하게 세상을 마주하는 은희를 위로하고 응원한다. 감자전을 꼭꼭 씹어먹는 은희를 조용히 지켜보는 영화의 따뜻한 시선은 긴 여운으로 남는다.   

영화는 주위 세계를 가족, 친구, 학교에서 국가(사회)로 확장하면서 은희를 더 큰 비극 속으로 몰아부친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은희의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 그러나 은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가능성으로 남겨둔다. 은희였을 우리들에게 던지는 물음이자, 사회에 던지는 화두다. '벌새'가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는 특별한 방식이다.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 박지후는 표정 없는 얼굴만으로 캐릭터를 만들어가고 영화의 메시지를 그려나간다. 그간 다수의 작품에서 보여준 것처럼 배우 김새벽은 자신만의 분위기로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한다. 그 외의 배우들 연기도 빈틈없다.

무엇보다 '벌새'의 성과는 첫 장편을 내놓은 '김보라 감독의 발견'이다. '벌새' 세계관의 출발점인 단편 '리코더 시험'(2011)으로 김 감독은 우드스탁영화제 학생 단편영화 부문 대상, 대구단편영화제 대상을 수상했다.

'벌새'는 작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첫 공개돼 넷팩상과 관객상을 수상하고, 이후 국내는 물론 제18회 트라이베카 영화제, 베이징국제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에서 대상을 비롯한 여우주연상, 촬영상을 받는 등 전세계 영화제 및 시상식에서 25관왕이라는 기록을 냈다.

영화는 오는 29일 개봉한다. 러닝타임은 138분, 관람등급은 15세다.

스포티비뉴스=유지희 기자 tree@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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