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키워드 키워드 기준 i금일 기준 많이 본
뉴스 기사의 키워드 수집

한국 올림픽 출전사 ⑩ 대규모 선수단, 그러나 은 2개 동 1개 기대 못 미쳐

작성일: 2016.07.15 09:30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본문 글자 크기 조정

  • 보통
  • 크게
  • 아주 크게
▲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밴텀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장창선(가운데). 오른쪽은 민관식 대한체육회장.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신금단을 포함한 북한 선수단은 10월 9일 철수했다. 신금단의 아버지 신금준 씨는 한국전쟁 도중인 1∙4후퇴 때 헤어진 딸을 만나기 위해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무작정 도쿄로 갔다. 철수 1시간 전 도쿄 조선회관에서 딸을 만났지만 부녀의 대화는 고작 7분이었다. 신금준 씨는 니가타행 열차가 떠나는 우에노역으로 달려가 역장실에서 다시 딸을 포옹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도 3분의 짧은 만남이었다. 부녀는 이후 다시 얼굴을 보지 못했고 신금준 씨는 1983년 사망했다. 

이 대회에 출전한 한국선수단 가운데 가장 다급하게 경기에 나선 종목은 여자 배구였다. 지역 예선에서 아시아 대표로 뽑힌 북한이 느닷없이 철수하자 국제배구연맹(FIVB)이 지역 예선에서 2위를 한 한국에 출전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도쿄 대회 때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배구는 일본의 전략 종목이었다. 일본은 실제로 이 대회 배구 여자부에서 금메달, 남자부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자 배구는 북한의 불참으로 출전국이 5개국으로 줄면서 정식 종목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위기에 놓였다. 한국은 FIVB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미 해체된 대표팀을 급히 다시 소집해 출전했으나 꼴찌에 그쳤다. 그러나 여자배구는 이후 기량을 갈고닦아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룬다.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은 정신조가 복싱에서, 장창선이 레슬링에서 각각 은메달을 차지했고 유도에서는 재일동포 김의태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정신조는 밴텀급 결승전에서 사쿠라이 다카오에게 2라운드 1분10초 만에 RSC로 졌고 장창선은 자유형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요시다 요시가츠에게 판정으로 패했다.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꾸준히 메달에 도전해 온 레슬링이 거둔 첫 번째 올림픽 메달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80kg급에 출전한 김의태는 준준결승까지 3경기 연속 한판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으나 준결승전에서 오카노 이사오에게 판정패했다. 세 선수 모두 금메달로 가는 길목에서 홈의 이점을 안고 있는 주최국 일본 선수들과 마주쳐 아쉬움이 컸다. 유도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은 유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 대회 4개 체급 가운데 안톤 헤싱크(네덜란드)가 우승한 무제한급을 제외한 3체급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한국은 16개 종목에 출전했으나 메달을 딴 3개 종목 외에는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특히 개인 종목으로는 가장 많은 16명의 선수가 출전한 육상은 마라톤을 뺀 모든 출전 종목에서 단 한 명도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마라톤에 출전한 3명의 선수 가운데 이상훈이 2시간 22분 02초8의 기록으로 11위를 차지한 게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1960년 로마 대회에 이어 2연속 우승한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에게 10여 분 뒤지는 기록이었다. 체조는 남자 단체전에서 13위를 했고 여자 개인 종합에서는 최영숙이 58위를 한 게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북한과 총성 없는 전쟁을 한 끝에 3-2로 이기는 등 6전 전승을 거두며 본선에 오른 남자 배구는 세계 수준과 실력 차를 절감하며 9전 전패로 꼴찌에 머물렀다. 다만 헝가리, 루마니아, 미국 등과 경기에서는 풀세트 접전을 펼치며 성장 가능성을 확인했다. 6명의 선수가 나선 역도에서는 페더급의 김해남과 미들급의 이종섭이 선전했으나 4위에 그쳤다. 

축구는 자동 출전한 일본을 빼고 아시아에 주어진 3장의 출전권을 이란, 북한과 함께 획득해 본선에 나섰다. B조에 편성됐던 북한이 앞서 언급한 문제 때문에 불참해 본선 B조는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모로코 등 3나라가 8강 티켓을 다퉜다. C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체코에 1-6으로 진 데 이어 2차전에서는 브라질에 0-4로 완패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에서 아랍공화국연합(이집트+시리아)에 0-10으로 참패했다. 1948년 런던 대회 이후 12년 만에 출전한 대회에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최악의 결과였다. 농구는 대회에 올림픽에 앞서 벌어진 세계 예선에서 5승 4패의 성적으로 극적으로 본선 출전권을 따 팬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조별 리그 B조에서 미국에 50-116으로 지는 등 7전 전패한 데 이어 순위 결정전에서도 모두 져 출전 16개국 가운데 최하위에 머물렀다. 

한국은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으나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로 종합 27위에 그쳤다. 대회 기간 열린 제 62차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이상백 KOC(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한국인으로는 이기붕에 이어  두 번째로 IOC 위원으로 선임됐다. 아마추어리즘의 수호자 에이버리 브런디지 IOC 위원장은 3선에 성공했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