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 핸드볼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금메달을 기점으로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종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한체육회 90년사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핸드볼은 1936년 베를린 대회 때 남자 11인제 경기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손으로 하는 축구를 표방한 당시 핸드볼은 이후 올림픽에서 사라졌고 1972년 뮌헨 대회 때 7인제 실내 경기(남자)로 올림픽에 복귀했다.

이어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때 여자부 세부 종목을 합류했고 한국은 12년 뒤인 1988년 서울 대회에서 여자가 올림픽 출전 사상 첫 단체 구기 종목 금메달의 위업을 이뤘다, 동서 화합과 인류애를 기치로 내세운 서울 대회와 이 종목이 올림픽 종목인 된 베를린 대회는 이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대회로 대비를 이룬다. 

여자 핸드볼은 올림픽 종목 채택 다음 대회인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아시아·아프리카·북미로 이뤄진 세계 예선을 통과했다. 그러나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의 보이콧 대열에 한국도 합류하면서 여자 배구(1976년 몬트리올 대회 동메달)에 이은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의 메달 꿈을 일단 미뤄야 했다. 

여자 핸드볼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불참한 가운데 은메달을 차지했다. 이어 서울 올림픽에서 대망의 금메달을 차지했다. 

여자 핸드볼이 이후 이룬 업적을 보면 이 종목이 한국 스포츠의 외연 확장에 이바지한 정도가 얼마나 큰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서울 올림픽 금메달을 이후 여자 핸드볼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 대회와 2004년 아테네 대회 은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동메달 등 금메달 2개와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로 금메달 3개의 덴마크에 이어 2018년 현재 올림픽 통산 메달 순위 2위에 올라 있다.

메달만이 아니다. 2000년 시드니 대회와 2012년 런던 대회 4위 등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이후 출전한 올림픽에서 8회 연속 4강 이상의 성적을 올렸다. 세계 규모 대회 단체 구기 종목 사상 찾아보기 어려운 놀라운 기록이다. 

서울 올림픽이 한국 스포츠의 전반적인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데에는 이 대회에서 벌어진 시범 종목들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이들 종목 관계자와 선수들이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공로도 빠뜨려선 안된다. 서울 올림픽에서는 배드민턴 여자 유도 태권도 야구 볼링이 시범 종목으로 열렸다. 

1964년 도쿄 대회 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유도는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때 제외됐으나 이후 모든 대회에서 열렸고 서울 대회 때 여자부가 시범 종목(7개 체급)으로 채택됐다. 1985년까지 남녀부가 따로 열렸던 유도 세계선수권대회는 1987년 서독 에센에서 벌어진 세계선수권대회부터 남녀부가 통합됐고 이듬해 여자부가 올림픽 시범 종목, 4년 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 되는 발빠른 발전 과정을 이뤘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유도 여자부에서 한국은 금메달리스트는 배출하지 못했지만 72kg급 김미정이 당시 세계 최강자인 벨기에의 잉그리드 버그만에 이어 은메달을 차지해 4년 뒤 이 체급 올림픽 초대 챔피언 자리를 예약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66kg급 금메달리스트인 조민선은 이 대회 48kg급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서울체육중학교 3학년 때인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 같은 체급에서 여자 출전 선수 가운데 가장 좋은 3회전(16강) 진출 성적을 올린 조민선이 서울 올림픽 이후 52kg급~56kg급~61kg급으로 체급을 높이며 각종 국제 대회에서 거둔 우수한 성적은 한국 스포츠 발전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1972년 뮌헨 대회 때 처음 올림픽 전시 종목으로 채택됐던 배드민턴은 서울 대회 때 시범 종목으로 열린 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정식 종목으로 올라섰다. 서울 대회에서는 남녀 단식과 남녀 복식 혼합복식 등 이후 정식 종목이 됐을 때와 똑같은 세부 종목이 펼쳐졌다. 

1981년 3월 30일 자 신문과 TV 스포츠 뉴스를 본 스포츠 팬들은 깜짝 놀랐다. 국내 매체 영국 특파원들과 AP통신 등 외신이 보도한 내용은 19살의 한체대 학생이 전통을 자랑하는 전영(全英)배드민턴선수권대회 여자 단식 결승에서 대회 2연속 우승자인 덴마크의 르네 캐팬을 세트스코어 2-0(11-1 11-2)으로 꺾고 우승했다는 것이었다. 이 선수가 바로 황선애다.

부상으로 20대 중반의 나이에 비교적 일찍 은퇴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황선애가 한국 배드민턴 발전에 기폭제 구실을 한 사실은 한국 스포츠 역사에 기록해 둘 만하다. 

이때로부터 7년 뒤인 서울 올림픽에서 여자 단식 황혜영, 여자 복식 김연자-정소영 조, 혼합복식 박주봉-정명희 조는 금메달 스매싱을 하며 이후 올림픽을 비롯한 주요 국제 대회에서 배드민턴이 효자 효녀 종목으로 맹위를 떨치게 되는 기폭제가 됐다. 서울 올림픽 배드민턴 경기는 서울대 체육관에서 열렸다. 

서울 올림픽 때 처음 올림픽 시범 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는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한 차례 더 올림픽 시범 종목으로 열린 뒤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남녀 4개 체급 모두 8체급 경기가 펼쳐졌다. 국기인 태권도가 한국 스포츠 외연을 넓히는 데 이바지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내용이다. 

서울 올림픽 태권도는 남녀 8체급, 모두 16체급 경기가 벌어졌다. 한국은 남자 50kg급 권태호와 여자 47kg급 추난율 등 9명의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했다. 종주국 한국에 강력하게 도전한 미국은 여자부 종합 1위와 남녀부 종합 2위에 오르는,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였다. 

야구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여러 차례 올림픽 무대에 도전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대회를 시작으로 1912년 스톡홀름 대회, 1936년 베를린 대회, 1952년 헬싱키 대회(핀란드식 야구), 1956년 멜버른 대회, 1964년 도쿄 대회까지. 그리고 신세대 야구 팬들이 아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대회(한국 4위)에서 또다시 정식 종목에 도전했고 서울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더 올림픽 문을 두드렸다. 

잠실 구장에서 열린 야구 경기에서 한국은 3위 결정전에서 푸에르토리코에 0-7로 완패해 2개 대회 연속 4위를 기록했다. 시범 종목이었지만 조계현 송진우 김기범 장호익 강영수 최해명 등 등 우수 선수의 프로 진출을 유보하면서 최상의 전력으로 나섰으나 준결승에서 일본에 1-3으로 져 메달의 꿈을 접었다. 

야구는 이후 처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에는 일본과 대만에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고 1996년 애틀랜타 대회에서 출전 8개국 가운데 꼴찌를 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이승엽과 구대성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을 3-1로 누르고 동메달에 입을 맞췄다. 

축구 월드컵과 비교할 만한 최고 수준의 국가 대항전인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4강에 오르며 기세를 올린 한국은 야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뒤 5번째 대회인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예선 리그 7경기를 포함해 9전 전승 금메달의 역사를 썼다. 

1970년대 태릉선수촌에 입촌해 각종 운동 기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다른 종목 선수들 눈총을 받았던 야구가 올림픽 무대에서 단체 구기 종목으로는 여자 핸드볼에 이어 두 번째로 금메달의 영광을 누린 것이다. 

야구는 2012년 런던 대회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 때 정식 종목에서 빠졌으나 2020년 도쿄 대회에서 복귀해 한국의 메달 전략 종목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서울 대회에서 은메달 1개(차영철)를 기록한 사격도 다른 종목의 눈총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올림픽 선수단에 소수 정예 주의가 적용되던 1970년대에 선수단이 끼어 들었으나 이렇다 할 성적으로 올리지 못했고 1972년 뮌헨 대회에서는 북한의 이호준이 금메달을 따 체면을 구기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 태릉에서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성공적으로 열어 스포츠 행정 측면에서 자신감을 얻었고 이어 서울 올림픽에서 꿈에도 그리던 메달을 거머쥐어 이후 효자 효녀 종목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56년 멜버른 대회 김창희(동메달) 이후 올림픽 메달의 맥이 끊겼던 역도는 서울 대회에서 전병관이 은메달을 들어 올리면서 옛 영화를 되살렸고 이후 대회에서 사격과 함께 효자 효녀 종목으로 한국 스포츠의 종목 다변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남자 뜀틀에서 박종훈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첫 메달(동) 연기를 펼친 체조도 서울 대회 이후 2012년 런던 대회 남자 뜀틀 금메달리스트인 양학선 등 여러 메달리스트를 배출하며 한국 스포츠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우승을 계기로 경기력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여자 하키는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의 영광을 차지했고 경기력을 꾸준히 끌어올린 남자 하키는 2000년 시드니 대회에서 남자 단체 구기 종목으로는 1988년 서울 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핸드볼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림픽 메달을 품에 안았다. 

1988년 가을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서울 올림픽은 국제 경쟁력을 갖춘 종목 다변화를 이뤄 낸, 한국 스포츠의 패러다임을 바꾼 대회로 한국 스포츠사에 길이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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