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현지(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수줍게 전화 인터뷰를 마쳤다. 그러나 파이터로서 목표와 롤모델을 입에 올릴 땐 단호한 말씨를 보였다.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제가 말을 잘 못해서..."

부드러운 통화 목소리와 함께 장현지(26, 부산 홍짐)와 인터뷰는 야트막한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주먹을 뻗는 억센 기운과 달리 그의 말씨는 기분 좋게 걸을 만한 뒷산을 닮았다.

당당한 전설을 동경하지 싶었다. 장현지와 나눈 전화 인터뷰는 차분했다. 링에서 보인 저돌적인 인상과는 180도 달랐다. 그는 기본적으로 조용했고, 대답을 던지기보다 질문을 끝까지 듣는 인터뷰이였다.

장현지는 지난 17일 스포티비뉴스와 전화 인터뷰에서 "옥타곤 안팎에서 당당한 론다 로우지를 배우고 싶습니다. 격투 스타일로 보면 제시카 안드라지를 닮고 싶고요. 저처럼 키가 작은 데도 힘 있게 주먹을 섞는 스타일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격투적인 면에서) 롤모델로 삼고 싶은 선수예요"라고 말했다.

과거 장현지는 "한국의 로우지가 되고 싶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다.

로우지는 여성 MMA 시장을 폭발적으로 키운 선구자. 로우지 어떤 면이 그를 사로잡았을까. 답은 '캐릭터'였다.

"제가 (보기완 달리) 겁이 좀 많은 성격입니다. 경기할 때는 그렇지 않은데 스파링할땐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예요, 경기 시작 전에도 무섭다는 감정이 솟아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로우지는 (옥타곤 안팎에서) 항상 자신 있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제겐 정말 크게 다가왔습니다. 제가 갖고 있지 못한 면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인상적으로 느껴져서 그때부터 로우지를 좋아하고 롤모델로 삼게 됐습니다."

이어 "평소 성격이 (저돌적인 경기 스타일과 달리) 말수가 적고 듣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금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웃음). 활발하지는 않지만 많이 웃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오해를 많이 하시더라고요"라고 덧붙였다.

싸우는 스타일로만 봤을 때 좋아하는 선수가 따로 있는지 물었다. 캐릭터를 벗어나 주먹을 맞대는 실제 스타일이 눈에 들어온 선수가 궁금했다.

장현지는 "싸우는 스타일은 안드라지를 좋아합니다. 저와 비슷하게 키가 작은 선수가 그라운드나 타격할 때 힘이 너무 좋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로우지도 좋아하지만 (로우지가 은퇴한) 지금은 안드라지를 제 (격투)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장현지는 제시카 안드라지를 격투 롤모델로 삼고 있다. ⓐ 엔젤스 파이팅
한국의 많은 파이터가 주머니 사정 탓에 '투 잡'을 뛰면서 선수 생활을 영위한다. 장현지도 그렇지 않을까. 실제 그는 소방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다. 목표는 분명했다. 결국 운동이었다. 안정적인 수입을 바탕으로 조금 더 운동에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대학 다닐 때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체육관을 다녔어요. 졸업 뒤에는 소방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 했는데 (부산 홍진 체육관) 박둘 관장님께서 프로 선수 생활과 공무원 시험 준비를 병행하긴 어려우니 체육관 사범을 맡는 게 어떠느냐고 제안해 주셨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부분이 많아서 만족스럽습니다. 사춘기 학생들은 콘트롤이 어렵지만 스무 살 넘긴 성인들은 말씀도 잘 따라주시고 배려해주셔서 (가르치기) 수월합니다(웃음). 즐겁게 수업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격투 얘기를 던졌다. 장현지는 지난 15일 엔젤스 파이팅 08 여성 스트로급에서 양서우(30, MMA스토리)와 주먹을 맞댔다. 결과는 장현지의 2-1 판정승. 이날 그는 묵직한 펀치와 맷집을 바탕으로 인상적인 인파이팅을 펼쳐 박수를 받았다.

양서우는 경기 초반 긴 리치를 활용해 장현지에게 거리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앞손을 내지를 때 상체가 들려서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원투 스트레이트가 더 빼어난 선수를 만났을 때 대처가 궁금했다. 자기 스타일 그대로 파고드는지 아니면 특별히 우회해 변칙 전략을 구사하는지가 알고 싶었다.

"일단 (경기·라운드마다) 세컨드 말을 잘 들으려 해요. 스즈키 마리야(24, 시무라 도장)처럼 노련하고 강한 타격을 지닌 선수라면 위빙이라든지 상체를 더 많이 흔들고 스텝을 살리면서 경기했을 것 같습니다. 양서우 선수가 절대 약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분명해요(웃음). 하지만 (몇 번 주먹을 섞다보니) 한 번 파고들어서 '맞을 땐 맞더라도' 들어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대줄 건 대주고 주먹을 섞어야겠다 판단이 들더라고요"라고 분석했다.

현장에서 봤을 때 엔젤스 파이팅 08에 출전한 선수 중 가장 활발히 '머리'를 움직였다. 경기 시작부터 종료 공이 울릴 때까지 헤드가 한시도 멈추질 않았다. 부단한 훈련량이 느껴졌다.

"제 키가 스트로급 내에서도 작은 편입니다. 리치도 그리 길지 않고요. 그래서 항상 상대 선수들이 (저와 붙을 때) 리치를 활용한 공격을 자주 펼치더라고요. 양서우 선수도 그랬습니다. 앞손 길게 뻗으면서 경기를 했습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평소에도) 위빙, 더킹을 경기 치를 때마다 신경 써서 펼친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습관이 점점 제 스타일로 굳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코치님께서도 평소 밸런스 잘 잡힌 상태에서 머리 흔드는 연습을 많이 시키시기도 했고요."

장현지는 양서우와 대결 뒤 눈물을 보였다. 경기에도 이겼고 팬들 환호도 끌어낼 만큼 화끈한 경기력을 보였음에도 눈물을 흘린 이유가 궁금했다. 승리를 떠나 욕심을 낸 과녁이 따로 있었는지 물었다.

장현지는 "판정승으로 이기긴 했지만 그동안 준비하고 연구했던 걸 전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너무 아쉬웠습니다. 이번에 (계속 부산 홍진 소속이긴 하지만) 박둘 관장님 이름 따라 따로 제 팀을 꾸려 치르는 첫 경기였습니다. 팀 명은 '팀 투 팍'인데(웃음). 연습할 때는 자연스럽게 잘 나왔던 게 (이번 양서우 전에서는) 하나도 못 보여드려서 개인적으로 속상했습니다. 코치님께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이긴 건 기쁘지만 경기 내용이 아쉬워서 눈물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라고 곱씹었다.

이어 "(가장 아쉬웠던 점은) 양서우 선수와 타격할 때 맞으면서 들어가는 건 괜찮았는데, 제가 따로 연습한 게 카운터와 사이드 스텝이었어요. 원래도 활발하게 밟았지만 들어가면서 순간적으로 빠지는 사이드 스텝, 그러면서 재차 공격하는 것. 이런 사이드 스텝을 활용한 (순간적인 속도 변환) 공격을 많이 연습했는데 그걸 하나도 살리지 못해 정말 속상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정해진 주제가 있었다. 장현지는 늘 승패를 떠나 경기 전 작은 주제를 설정하고 링에 올랐다고 했다. 파이터로서 성장 촉매제가 될 수 있을 듯했다.

"네, 맞습니다. 저희 팀은 항상 '주제' 하나를 정해놓고 매 경기 임합니다. 작은 세부 목표 같은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승리도 중요하지만) 이런 작은 주제를 꼭 달성하면서 이기자는 마인드로 링에 오릅니다. (이런 태도가) 격투 선수로서 성장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파이터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엇인지 질문했다.

장현지는 "모든 파이터가 그렇겠지만 '큰 선수'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아직은 정말 먼 꿈이지만 UFC에 진출하는 것도 파이터로서 이루고 싶은 꿈입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이루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운동 시작한 이유가 제가 좋아서 한 것도 있지만 우리 가족한테 인정 받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입니다. 큰 선수가 돼서 가족들한테 인정 받는 딸이 되고 싶어요. 꼭 그러고 싶습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수화기 넘어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포근했다. 한마디 꺼낼 때마다 배려가 묻어 나왔다. 말도 조리 있게 잘했지만 말씨가 사근사근, 부드러웠다. 별명인 '코리아 사모아인'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퍼뜩 물음표가 스쳤다. 사모아인이란 별명이 마음에 드는지, 어떻게 이런 별칭을 갖게 됐는지 물었다. 경기 스타일은 진짜 사모아 혈통 마크 헌트와 흡사하긴 했다.

장현지는 "엔젤스 파이팅 07을 준비할 때 야외 연습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스포츠 테이핑을 하고 있었는데 그 (붙여진 테이핑) 마크대로 제가 살이 타버렸습니다.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을린 문양이 사모아인 같다고 주변에서 엄청 놀리셨어요(웃음). '현지는 맞아도 잘 안 쓰러지니까 사모아인이 정말 알맞은 별명인 것 같다'며 (파이터 별명을) 즉석에서 지어주셨습니다. 저는 만족스러워요. 계속 이 별명을 사용하고 싶습니다"라며 웃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웃음소리에서 해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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