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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일의 NBA 액션] 잊고 싶은 기억 ② 스프리웰의 '감독 폭행'

작성일: 2015.10.14 06:00 SPOTV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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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조현일 해설위원] 누구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다.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던 일, 민망하고 황당했던 일, 차라리 겪지 않았으면 하는 사연들을 누구나 갖고 있다. 2015~2016 NBA 시즌 개막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현재, 선수들의 머릿속에 있는 몇 가지 ‘잊고 싶은 기억’을 정리해봤다.

“앙갚음하려 하지 마라.” “남을 탓하거나 미워하지 마라.” “내가 모두 옳다고 판단하지 마라.” 틱낫한 스님은 ‘화’라는 책에서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이같이 제시했다. 복잡한 인간세계에서는 누구나 통제하기 어려운 화를 안고 살아간다.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화를 다스리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지난 2004년 11월 NBA 팬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팬들과 인디애나 페이서스 선수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NBA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NBA 사무국은 팬들에게 주먹을 날린 인디애나 주축선수들의 출전정지 징계를 내렸다. 이 징계로 팀 내 핵심 전력을 잃은 인디애나는 사실상 시즌 아웃 상태에 빠졌다.

최악의 폭력 사건이 일어난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내면에 있는 ‘화’를 다스리지 못한 탓이 크다. 2004년의 인디애나 선수들처럼 한순간의 판단 실수로 감당하기 어려운 큰 대가를 치른 선수가 있다. 바로 ‘악동’ 라트렐 스프리웰(45)이다. 스프리웰에게 두 번째 ‘망각의 알약’ 처방전을 발행하려 한다.

◆ 리그 최고의 라이징 스타

1992~1993시즌 NBA에 데뷔한 스프리웰은 그해 15.4득점 3.8어시스트 3.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프로 무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올-루키 세컨드 팀에 뽑히며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마이클 조던 은퇴 후 맞이한 첫해(1993~94시즌)에 올-NBA 퍼스트 팀에 뽑히는 영예를 누렸다. 수비에서도 재능을 뽐냈다.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리며 2년 만에 리그를 대표하는 공수겸장으로 성장했다.

팬들은 스프리웰의 플레이에 열광했다. 화끈한 속공 마무리와 환상적인 투 핸드 덩크, 불규칙한 스텝 이후 던지는 점퍼가 일품이었다. 스프리웰은 1994~1995시즌에 2년 연속 올스타전에 나서며 상승세를 이어 갔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팀에 대한 불만은 조금씩 쌓여 갔다. 절친한 동료였던 크리스 웨버, 빌리 오웬스가 트레이드된 이후 불만을 싹 틔웠다. 스프리웰은 트레이드를 주도했던 돈 넬슨 감독과 불화를 빚었다. 경기용 농구화에 웨버, 오웬스의 백넘버를 새기는 등 반항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기존 동료와도 원만히 지내지 못했다. 워리어스 주축이었던 팀 하더웨이, 제롬 커시와 시즌 내내 으르렁댔다. 스프리웰 속의 ‘화’는 넘치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1995~1996시즌 중반, 견원지간이었던 하더웨이가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하면서 골든스테이트는 마침내 스프리웰의 팀이 되었다. 1996~1997시즌은 스프리웰의 원맨쇼가 절정을 이루던 해였다. 생애 최다인 경기당 평균 24.2득점과 6.2어시스트를 올리며 펄펄 날았다. 그러나 팀 성적은 여전히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지역 언론은 스프리웰을 일컬어 ‘개인 성적에만 신경 쓰는 이기적인 선수’라고 비난했다.

이듬해인 1997~1998시즌에도 믿을 만한 선수는 스프리웰뿐이었다. 스프리웰은 개막전이었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 경기에서 45점을 챙기며 기분 좋게 출발했다. 그러나 스프리웰의 불만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1997-1998시즌 개막에 앞서 PJ 칼리시모 감독과 5년 계약을 맺은 팀 수뇌부에 큰 반감을 품었다. 칼리시모도 스프리웰을 탐탁지 않아 했다. 혼자서만 하려는 스프리웰의 독단적 공격 성향을 꺼려했다.

스프리웰과 워리어스 사이는 점점 악화됐다. 결국, 골든스테이트는 스프리웰을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워리어스 구단 수뇌부는 마이애미 히트, 샌안토니오 스퍼스 등과 활발한 협상을 벌였으나 트레이드는 이뤄지지 않았다..

◆ 화를 주체하지 못하다

1997년 11월 9일에 열린 LA 레이커스전에서 워리어스의 라커룸 분위기는 최악에 가까웠다. 레이커스와 경기에서 대패한 뒤 스프리웰이 팀 미팅에서 칼리시모에게 조롱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었다. 칼리시모 감독도 지지 않았다. 스프리웰을 향해 “남은 시즌 동안 벤치 멤버로 출전하라”고 통보했다.

이때부터 속된 말로 ‘개싸움’이 벌어졌다. 스프리웰은 이성을 잃었다. 칼리시모 감독을 향해 갖은 욕설과 함께 “농담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칼리시모 감독은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공언대로 디트로이트전에 스프리웰을 주전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불만과 화가 머리끝까지 차 있던 스프리웰은 마침내 대형 사고를 쳤다. 1997년 12월 1일, 팀 자체 연습 도중 칼리시모 감독의 목을 조르며 “널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20분 뒤 연습장으로 다시 돌아온 스프리웰은 다시 한번 칼리시모의 목을 졸랐다. 팀 동료, 어시스턴트 코치의 만류로 스프리웰의 일방적 폭행은 가까스로 끝이 났다. 그러나 칼리시모 감독의 목에는 이미 3인치 크기의 상처가 났다.

스프리웰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게리 세인트 주니어 단장 사무실로 찾아가 또 한번 행패를 부렸다. “당장 나를 여기서 떠나게 해 달라.” 이틀 뒤 워리어스는 “스프리웰과 맺은 잔여 3년 계약을 해지한다”고 발표했다. NBA 사무국은 중징계를 내렸다. 데이비드 스턴 총재는 “향후 1년 동안 스프리웰의 경기 출전을 불허한다”며 강력하게 대처했다.

이때 NBA 선수노조가 ‘스프리웰 살리기’에 나섰다. 기자회견을 열어 사무국의 징계 완화를 요구했다. 존 피릭 중재인은 “징계가 지나친 감이 있다”며 선수노조의 의견에 힘을 실었다. 결국, 이 사태는 스프리웰이 워리어스와 잔여 계약을 유지하되 1997-1998시즌 잔여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스프리웰은 선수생활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28살 커리어를 한번의 실수로 날리고 말았다. ‘화’를 다루지 못해 대중으로부터 감당하기 힘든 비난을 받았고 또 상처를 입었다.

금전적인 손해도 매우 컸다. 스프리웰의 용품 스폰서였던 ‘컨버스’는 강화된 도덕 조항을 들고 나오며 일방적 계약 파기 소송에서 승소했다. 이 탓에 스프리웰은 컨버스 측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계약금을 모두 날렸다. 여기에 잔여 연봉 640만 달러도 받지 못했다. 부양가족이 적지 않았던 스프리웰 입장에서는 너무나 큰 손해였다.

◆ 실수를 극복해내다

사실 칼리시모 감독도 선수들과 관계가 원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 시절 로드 스트릭랜드처럼 자신의 기호에 맞지 않는 선수들과 불화를 겪었으며 가시 돋친 독설가로도 유명했다. 또,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감독 시절에는 케빈 듀란트를 슈팅가드로 기용해 빈축을 샀다.

1999년, NBA 역사상 가장 길었던 출장정지 징계가 마침내 끝이 났다. 스프리웰은 존 스탁스, 크리스 밀스, 테리 커밍스와 트레이드로 뉴욕 닉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뉴욕에서 맞이한 1998~1999시즌, 스프리웰은 발뒤꿈치 부상에 시달리며 50경기 가운데 36게임 출전에 그쳤다. 경기당 평균 16.4득점에 머무는 등 거의 한 시즌을 쉰 후유증이 차기 시즌에 나타났다,

원정 팬들과 신경전도 스프리웰이 이겨나가야 할 장애물이었다. 관중들은 스프리웰이 공을 잡을 때마다 엄청난 야유를 퍼부었다. 특히 ‘친정’ 골든스테이트와 원정경기에서 발생한 소음 데시벨은 NBA 파이널 수준과 비슷했다.

스프리웰은 승부사였다.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진가를 드러냈다. 스프리웰은 패트릭 유잉이 부상으로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던 닉스를 파이널까지 이끌었다. 당시 닉스는 동부 컨퍼런스 8위로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한 팀이었다.

알렌 휴스턴과 ‘트윈테러’를 구축한 스프리웰은 단 한 시즌 만에 뉴욕 홈팬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선수로 떠올랐다. 약 10년 동안 유잉 저지를 입고 홈경기를 찾았던 스파이크 리(영화감독)도 33번 대신 8번이 새겨진 스프리웰의 유니폼을 입고 닉스 응원에 나섰다.

선행에도 앞장섰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 주최한 ‘어린이를 위한 자선단체’에 역사상 최고액인 10만 달러를 기부했다. 언론, 팬들의 시선도 조금씩 호의적으로 변했다. 2002~2003시즌 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로 이적한 스프리웰은 2년을 더 뛴 뒤 NBA 경력을 마감했다.

프랑스 시인 랭보는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저 극복이 전부인 것을”이라 말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엄청난 비난을 들었던 스프리웰은 이듬해 멋지게 시련을 극복해 냈다. 좌절하는 대신 반등의 계기를 찾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으며 실력이 실수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대다수의 팬들에게 ‘악동’ 이미지로 남아 있는 스프리웰. 은퇴한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많은 이들이 90년대를 풍미했던 그의 플레이를 그리워하고 있다.

[사진1] 라트렐 스프리웰 ⓒ Gettyimages

[사진2] PJ 칼리시모 감독 ⓒ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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