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스포티비뉴스=김상화 칼럼니스트] ※아래 글에는 '정이'의 일부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화제의 SF 영화 '정이'가 지난 20일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넷플릭스의 2023년 첫번째 오리지널 한국영화라는 점 외에도 '부산행', '방법', '지옥' 등 특유의 염세주의적 가치관을 녹여낸 연상호 감독의 신작, 고 강수연 배우의 유작이라는 점에서 '정이'는 공개 이전부터 화제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동안 넷플릭스 오리저널 영화는 자체 기획물 보단 코로나 악재 속 극장 개봉이 여의치 않았던 대작들이 큰 틀을 잡아준 바 있다.  2020년 '사냥의 시간''을 필두로 '콜', '승리호', '낙원의 밤', '야차' 등이 대형 스크린 대신 OTT로 눈길을 돌렸고 넷플릭스는 이를 자사 컨텐츠 확대의 기회로 삼아왔다. 

그런데 지난해 이후 넷플릭스는 극장 개봉 포기작의 합류 보단 자체 기획 및 제작 영화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고 해당 작품들에 대한 반응은 결과적으로 극명하게 엇갈렸다. '20세기 소녀' 처럼 시청자들의 좋은 호응을 이끌다가도 '카터', '서울대작전'에선 이용자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미 완성된 작품을 들여왔던 '승리호'와 다르게 넷플릭스가 직접 관여한  SF 영화 '정이'는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물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SF 액션 영화를 우리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대감은 재생 버튼을 클릭한 이후 아쉬움 혹은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 A.I. 전투 용병을 대량 생산해라

'정이'의 시대 배경은 현재로부터 100년 이상 흐른 미래 세계이다. 더 이상 지구에서 살수 없게된 인류는 우주로의 이주를 결정하고 지구와 달의 궤도면 사이 '쉘터'라는 생존 공간을 만들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이주시킨다.  그런데 일부 쉘터들이 아드리안 자치국을 만들고 다른 쉘터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고 이는 연합국과의 수십년에 걸친 전쟁으로 이어진다. 

최고의 용병으로 손꼽혔던 윤정이(김현주)는 작전 중 치명상을 입으며 사망이나 다름없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암 투병중이던 정이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를 살릴 돈이 필요했던 할머니는 뇌복제 실험용으로 정이의 뇌를 넘기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A.I. 연구를 전담하는 크로노이드 연구소는 이를 복제해 적군을 섬멸시킬 수 있는 연합국의 전투 용병 개발에 총력을 쏟아 부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윤서현(강수연)은 다름 아닌 정이의 딸이었다.

여러 종류의 가상 전쟁터 속 전투를 펼치는 시뮬레이션에서 정이의 복제품 A.I.들은 속속 고비를 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한다.  괴팍한 성격의 연구소장 김상훈(류경수)는 서현을 비롯한 연구원들을 몰아부치면서 어떻게든 용병 로봇 개발을 성공시키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오랜 기간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은 연구가 중단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지친 연합국과 아드리안 자치국이 조만간 종전 협정을 맺게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이렇게 A.I. 개발이 마무리될 무렵 예상치 못했던 일이 터지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시도는 좋았는데…익숙한 SF물의 답습

강수연, 김현주, 류경수 등 주요 출연진이 등장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얼핏 화면만 본다면 '정이'는 흔히 극장과 TV 속 해외 SF 시리즈로 착각할 만큼 과거에 비해 진일보해진 한국 영화계의 영상 기술 향상을 체감할 수 있다.  '터미네이터', '로보캅', '엑스맨', '블레이드 러너' 등 수많은 할리우드 대작들에 견줄만한 우리만의 작품 탄생을 기대해도 될 만한 여건은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였다.  90여분에 걸친 이야기의 흐름은 많은 시청자들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존 작품들의 답습이라는 틀에 갖히고 만다.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기능을 상실한 인간을 A.I. 로봇으로 이식해 재탄생시킨다는 설정은 이미 1987년 '로보캅' 원작과 2014년 리부팅 작품을 통해 익숙한 그림이다. 

돈벌이에 눈이 멀어 윤리 따위는 쓰레기통에 집어 던진 연구소와 박사의 등장 또한 ‘로보캅' 속 OCP, ‘엑스맨'의 트라스크 컴퍼니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군인들을 대신할 대량 살상용 로봇이 정이를 공격하기 위해 단체로 등장하는 장면은 '엑스맨', '아이.로봇' 등에서 숱하게 봐왔던 그림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거액의 비용을 들여 하나의 의체로 뇌를 복제해 영생을 얻는다는 건 기계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심이 등장했던 '은하철도 999'를 떠올려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이밖에 연구소장의 정체가 로봇임이 드러나는 중반부 ('웨스트월드'), 수시로 실시되는 연구진의 윤리 테스트('애드 아스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찾아보기 어려운 연상호 감독만의 개성

수십년에 걸쳐 각종 SF 영화와 드라마가 쏟아졌음을 감안할 때 '정이'와 기존 작품들과의 닮은 꼴 전개는 어느 정도 용납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흡인력 있는 이야기 마련, 개성 넘치는 연출로 일정 수준까지 독자성을 확보하느냐 여부였다.  아쉽게도 '정이'에선 이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익숙한 설정과 틀이 지닌 한계를 넘기 위한 연상호 감독만의 비책 또는 개성의 부재는 '정이'를 흔하디 흔한 SF물로 머물게 만든다.

더 큰 약점은 A.I. 로봇을 둘러싼 고민의 결핍이다. 오리지널 '로보캅'을 비롯해서 'A.I.’, ‘블레이드 러너', '아이.로봇' 등 디스토피아 기반의 미래 세상을 다룬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물음에 대해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반면 '정이'에서 곁가지 수준으로만 사용되다보니 이와 같은 시도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되려 중반 이후 신파에 가까운 정서의 변질과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이야기 전개로 인해 중요한 기회마저 잃어버린다. 뒤늦게 모성애를 인식한 A.I. 정이와 서현의 관계에 집착하는 동안 '정이'는 치명상을 입은 로봇의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배우, 소재, 기술력 등 좋은 재료는 구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배합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마치 완성되지 못한 크로노이드 연구소의 수많은 전투 로봇들처럼….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 넷플릿스 영화 '정이'  | 출처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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