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1959년 8월, 17살 까까머리 고교생이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선수단의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 학생은 오직 야구 하나만을 생각하며 이듬해 귀국해 국내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교통부, 기업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한 뒤에는 충암고와 신일고 등 야구 명문교 감독을 맡아 아마추어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1982년에는 OB 베어스 코치로 프로 야구 출범에 함께했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그리고 다시 35년의 시간이 흘러 70대 중반이 된, 60여년 전 ‘야구 소년’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23일 하루 종일 퇴진 형식을 두고 설왕설래했던 김성근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의 퇴진이 이날 밤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스포티비뉴스가 보도한 김성근 전 감독 퇴진 관련 기사는 아래와 같다.
한화는 23일 KIA 타이거즈와 홈경기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김성근 감독의 사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화는 "시즌 도중 감독 부재 상황이 벌어진 만큼 우선 팀이 어느 정도 정상화될 때까지 이상군 감독 대행 체제로 선수단을 운영할 계획이다. 조속히 팀 분위기를 수습하고 구단 정상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성근 전 감독의 퇴장은 한국 야구에서 ‘재일 동포 야구 시대’가 끝났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국내 야구 발전에 이바지한 재일 동포 선수들의 국내 진출에는 대략 두 차례의 큰 흐름이 있다. 첫 번째는 1960년대 초로, 이때 선수로는 OB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 감독을 지낸 김영덕, 그리고 김성근 외에 신용균 배수찬 박정일 서정리 등이 있다. 그 무렵 실업 야구는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었고 많을 때는 13개 팀이 시즌을 치렀다. 우수 선수 수급이 필요한 때였다.
신용균은 한국이 1963년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을 누르고 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한국은 더블 리그로 벌어진 이 대회에서 일본을 5-2, 3-0으로 눌렀다. 신용균은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투수가 됐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초 프로 야구가 출범할 때이다. 장명부 이영구(이상 삼미 슈퍼스타즈) 주동식 김무종(이상 해태 타이거즈)을 시작으로 홍문종(롯데 자이언츠) 김일융 송일수(이상 삼성 라이온즈) 최일언 송재박(이상 OB 베어스) 유고웅(MBC 청룡) 고원부(빙그레 이글스) 등 적지 않은 재일 동포 선수들이 얇은 국내 선수층을 메우며 프로 야구가 조기에 자리를 잡는 데 이바지했다. 1960년대에는 개별적으로 한국으로 왔지만 1980년대에는 KBO가 이들의 국내 진출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했다.
국내에 진출한 ‘빨간 여권'(일본 여권의 표지가 빨간색이서 붙은 재일 동포 선수들에 대한 별칭)을 갖고 있던 재일 동포 선수들은 어떤 심정으로 선수 생활을 했을까. 글쓴이가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1983년 10월 21일 잠실 구장에서 열린 MBC-해태의 한국시리즈 5차전이 끝난 뒤 곧바로 시즌 시상식이 열렸다. 2만여 명의 관중은 자리를 뜨지 않고 첫해에 이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프로 야구 2년째 마지막 날을 지켜봤다. 한국시리즈 우승, 준우승 팀에 대한 시상에 이어 각종 개인상이 시상됐다.
장명부는 30승으로 다승 1위와 함께 베스트 10으로 뽑혀 역시 베스트 10이 된 김무종과 나란히 시상대에 섰다. 그런데 몇 마디 얘기를 나눈 두 선수의 눈이 조명에 비치는 순간 반짝였다. 당시로는 현역 선수로 적지 않은 나이인 33살과 29살의 사나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반 쪽바리’, 일본에서는 ‘조센진’으로 불리며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재일 동포 출신 두 선수는 그 자리에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그때로부터 20여년 전에 한국으로 온 김성근 전 감독을 비롯한 재일 동포 1세대들이 어떻게 선수 생활을 했을지는 두 선수의 사례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힘들게 살던 1960~70년대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롯이 스스로 힘으로 일어서야 하는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1986년 6월 어느 날 광주 원정에 나선 OB는 무등산 자락에 있는 어느 호텔에 묵고 있었다. 원정 팀 취재를 위해 김성근 감독의 방에 들렀을 때 그는 반바지만 입은 채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침대 하나 가득한 각종 자료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있었다. 요즘이야 노트북에 각종 자료가 보기 좋게 정리돼 있지만 그때는 각종 통계 분석 작업을 일일이 손으로 해야 했다.
26년 전 혈혈단신으로 부모의 나라에 온 '야구 소년‘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그때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여섯 자리뿐인 프로 야구단 감독이 돼 있었다.
“조금 봐도 되겠습니까.” “이건 그냥 타순 짜는 데 참고하려고 만든 자료야.”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자료를 슬며시 시트 밑으로 밀어 넣었다. 데이터 야구는 그렇게 진화하고 있었다.
고 김동엽 감독은 기자들과 농담을 할 때면 “왜 기자(記者)야. 자는 ‘놈 者’이니까 기가(記家)라고 불러야지”라곤 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좋은 말을 듣기 어려운 기자들에게 호칭이라도 좋게 붙여 줘야 한다며 그렇게 말했다. 김 감독이 말하는 기가는 대가(大家)와 뜻이 닿아 있었다.
그라운드에 머문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서였을까. 야구 인생 막바지에 노 감독은 손자뻘이 되는 이들에게도 비난을 받아야 했다. 과(過)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김성근 전 감독도 다른 재일 동포 출신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야구 발전에 나름대로 힘을 보탰다. 그라운드를 떠나는 김성근 전 감독에게 ‘야구 대가’라는 칭호를 붙여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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