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TV NEWS=조현일 해설위원] 본업뿐만 아니라 부업에도 많은 신경을 쓰는 NBA 선수들이 속출하고 있다. 한 가지만 잘 해서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 흐름에 직업의 종류도 훨씬 다양해진 덕분이다. 부업을 통해 농구 이외의 꿈을 실현하고 짭짤한 수익까지 맛 본 NBA 선수들을 소개한다.

마이클 조던의 끝없는 욕심

‘부업’ 하면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마이클 조던이다. 2003년 은퇴 이후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여러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조던은 지난 2006년 로버트 존슨이 합작투자를 위해 내놓은 샬럿 밥캐츠(現 호네츠)의 일부 지분을 모두 매입, 밥캐츠 공동 구단주 명함을 받았다. 당시 존슨은 “조던과 함께 할 수 있어 대단히 흥분된다. 농구에 관한 전문적 지식뿐만 아니라 그의 사업적 재능 역시 높이 산다”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존슨은 4대 메이저 스포츠 가운데 최초로 흑인 구단주가 된 인물. 하지만 당시의 기분이 얼마나 지속되었을지는 미지수다. 공동 구단주 부임 이후 조던은 샬럿 지역 언론으로부터 “골프에 미친 사람이다”, “팀 운영은 아예 뒷전이다”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했다. 한 차례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뤄내기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진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
사실, 조던은 샬럿이 아닌 밀워키 벅스의 최대주주 자리를 노렸다. 하지만 벅스 고위 관계자가 그의 합류를 탐탁지 않아했고 그 탓에 결국 샬럿으로 행선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샬럿 구단주로 부임하기 전, 조던은 레스토랑, 피트니스 센터 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하지만 기대만큼의 결실을 맺진 못했다. 시카고 도심에 냈던 레스토랑은 일찌감치 문을 닫은 상태. 디버스필드 부동산과 라스베이거스에 합작 설립한 조던 명의의 피트니스 센터는 테니스 코트, 조깅 트랙, 에이로빅 룸 등 최첨단 시설을 자랑했으나 폐업한 레스토랑과 마찬가지로 수익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조던을 실패한 사업가라 보긴 힘들다. 농구 용품 업계에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조던 브랜드의 판매량이 워낙 높기 때문. 나이키에서 완전히 독립한 조던 브랜드는 크리스 폴, 러셀 웨스트브룩, 카멜로 앤써니 등 내로라하는 NBA 스타들을 앞세워 수만 켤레의 신발 및 농구 용품들을 팔아치우고 있다. 농구화 제작에 직접 참여하고 세밀한 마케팅 플랜을 짜는 등 이윤 창출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 NBA 스타들

현역에서 물러난 NBA 선수들은 새로운 밥벌이를 찾기 위해 저마다 분주하게 움직인다. 자동차 판매원, 음식점 주인, 가수 등 업종도 다양한 편.

댈러스 매버릭스, 샬럿 호네츠, 마이애미 히트를 거치며 좋은 활약을 펼쳤던 저말 매쉬번은 현역 시절부터 투잡을 뛴 인물이다. 히트에서 활약하던 1999년부터 자동차 사업을 시작한 그는 “처음에는 신통치 않은 결과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둘까도 생각했다”며 사업 초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씩 경험을 쌓으면서 사업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매쉬번은 도요타, 포드, 렉서스, 크라이슬러, 포르쉐 등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를 다루는 ‘큰 손’으로 거듭나는데 성공했다. 무려 5개 지점을 갖춘 어엿한 사장님이 된 것이다.

부상이 큰 이유로 작용하긴 했지만 31살의 젊은 나이에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한 것도 자동차 사업의 호황이라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매쉬번의 마지막 시즌 성적은 20.8점 6.2리바운드 2.5어시스트. 전성기에 견주어 뒤질 것이 없는 생산력이었다.

NBA 사무국도 매쉬번의 뛰어난 사업가로서의 능력을 인정했다. 매쉬번은 은퇴 이후 성공적인 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선수들을 위한 모임인 ‘Legend in business’ 행사에 명사 자격으로 초대를 받아 자신만의 사업 비법을 설명하기도 했다. 매쉬번은 자동차 사업뿐만 아니라 『ESPN』의 NBA 패널로도 활약하는 등 선수 시절 못지않은 수입을 벌어들였다.

현역 시절, 픽-앤-롤 교과서로 불렸던 존 스탁턴, 칼 말론은 중고차매매업으로 제 2의 인생을 이어간 인물들이다. 두 선수는 유타 市가 위치한 솔트 레이크 시티에 자동차 딜러샵을 세워 코트 밖에서도 호흡을 맞췄다. 매장 이름은 ‘스탁턴 투 말론.’

이에 앞서 말론은 1993년 ‘말론 엔터프라이즈’라는 트럭 회사를 설립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2년 뒤 문을 닫고 말았는데 말론의 소극적인 사업 참여가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좋은 약이 됐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은 할 수 없었다.” 1993년 당시 말론이 남긴 말이다.

현역에서 물러난 선수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고 있는 사업은 요식업이다.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데다 어느 정도의 자금력만 가지고 있으면 상대적으로 쉽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9 NBA 아시아 챌린지 행사 차 방한하기도 했던 팀 하더웨이는 선수생활을 보냈던 마이애미와 고향 시카고에서 부동산 사업과 함께 치킨점포를 열어 재미를 봤다. 올 시즌 현재, 하더웨이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활약 중이다. 무시무시한 블록슛 능력을 보였던 마크 이튼 역시 레스토랑 사업가로 이름을 날렸다.

히트의 에이스, 드웨인 웨이드는 다소 일찍 실패를 맛 본 케이스다. 웨이드는 마이애미에 ‘D.wade's 스포츠 그릴’이라는 레스토랑을 개업했으나 사업 파트너와의 계약 문제가 불거지며 조기에 문을 닫고 말았다. 웨이드의 사업 파트너 측은 계약 위반에 따른 소송을 낸 후 “웨이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그와 맺은 계약을 진행할 수 없다”며 “15,000만 달러의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마이애미에 위치한 이 레스토랑은 여성 종업원들이 심판 유니폼을 입고 서빙을 하는 스포츠 바로써 많은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사라지는 비운을 맛보고 말았다.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팀 던컨, 데이비드 로빈슨의 백업으로 훌륭한 활약을 펼쳤던 말릭 로즈는 샌안토니오 도심에 식당을 차려 쏠쏠한 재미를 봤다. 필라델피아가 고향인 그는 지역 명물인 치즈를 이용한 스테이크를 주 요리로 내세웠다. 현역 시절 보여줬던 성실함과 뛰어난 미각을 바탕으로 까다로운 입맛을 지닌 남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평. NBA 해설가로도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현역 시절 알코올 중독과 과체중으로 고생했던 빈 베이커는 고향 올드 세이브룩에서 해물 레스토랑 체인점을 열어 새로운 재능을 과시했다. 휴스턴 지역 라디오 쇼 DJ로도 활동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매직 존슨은 농구 실력만큼이나 뛰어난 사업 수완을 자랑한다. 30개에 달하는 햄버거 프랜차이즈를 비롯해 패밀리 레스토랑까지 매입, 이후 주변 상가를 다 구입할 정도로 큰 재미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주식 대박에 이어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사업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존슨은 영화와 엔터테인먼트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매직 존슨 엔터프라이즈’라 명명된 존슨 명의의 이 회사는 공격적인 투자 덕분에 매년 가파른 성장세를 그렸다.

물론, 씁쓸한 기억도 있었다. 1998년, ‘더 매직 아워’라는 토크쇼를 시작했으나 두 달 만에 시청률 저하로 폐지되는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존슨은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현역 시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뮤지션을 꿈꾸는 그들

앨범 제작에 열을 올리는 이들도 있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르브론 제임스와 호흡을 맞췄던 다니엘 깁슨은 여자 친구이자 유명 가수인 케시아 콜의 도움을 받아 랩 앨범을 출시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지역 언론과 팬들은 “그 시간에 수비나 외곽슛 연습을 해야 할 것”이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쳤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깁슨은 7년에 걸친 NBA 커리어를 접어야 했다. 알렌 아이버슨, 토니 파커, 카멜로 앤쏘니 역시 앨범을 발매했으나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음악 평론가들은 NBA 스타들이 발매하는 앨범을 ‘예술’이 아닌 흑인 특유의 ‘문화’라 보고 있다. 앨범 발매를 통해 수익을 노리기보다 자신의 성장환경이나 가치관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는 것. 선수들 스스로도 앨범 판매량에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하지만 샤킬 오닐만큼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힙합 앨범이 두 차례나 골드레코드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특히 첫 앨범인 ‘샤크 디젤’은 “흥행성과 음악성을 고루 갖춘 보기 드문 스포츠 스타 앨범”이라는 호평을 들었다.

오닐은 다양한 부업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24시간 피트니스 센터를 개설한데 이어 2005년에는 ‘덩크맨’이라는 농구화 브랜드를 개발, 중국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며 통장 잔고를 늘렸다. 덩크맨은 다른 스포츠 브랜드 농구화 제품에 견줘 40%가량 낮은 가격으로 출시돼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이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편, 카멜로 앤써니는 2008년 필라델피아 출신 래퍼 케씨디와 함께 팀을 이뤄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 이름은 ‘Language Arts.’ 리키 로스, 쿨 & 드레, 자다키스 등 이름난 게스트들이 참가해 완성도를 높였다. 그러나 판매량은 여느 NBA 스타들의 앨범이 그렇듯 대단히 저조했다.

2005-06시즌 도중 랩 앨범을 발매한 아테스트(現 메타 월드 피스)는 당시 감독이었던 릭 칼라일에게 면담을 요청, “가수 활동을 위해 시즌 도중에 휴가를 달라”고 말해 또 한 번 리그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소속팀이었던 인디애나 페이서스 구단은 당연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테스트는 이에 불만을 품고 태업으로 일관하다 새크라멘토 킹스로 트레이드 되고 말았다. 부업을 위해 본업을 소홀히 한 대표적인 사례로 “역시 제 정신이 아니다”라는 비판 세례를 한 몸에 받아야 했다.

NBA가 부업?

반대로 NBA를 부업으로 삼은 이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선수는 케빈 가넷과 함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던 트로이 헛슨. 헛슨은 스스로 “개인 앨범을 내기 위해 NBA에서 선수 생활을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는 인물이다. 2007년, ‘back to the block’이란 제목의 앨범을 내놓으며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판매량은 참혹했다. 첫 주에 고작 78장만이 팔린 것. 당시 헛슨의 NBA 연고지인 미네아폴리스에서 38장, 인디애나폴리스에서 4장이 판매되었는데 정작 고향인 일리노이 주에서는 단 한 장도 팔지 못했다. 헛슨의 개인 첫 앨범 판매량은 1,000장이 채 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농구보다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평을 받았던 헛슨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故 웨이먼 티스데일 역시 본업인 농구보다 음악을 더 사랑했던 사람이다. 7장의 정규앨범, 1장의 베스트 앨범을 비롯해 싱글 음반까지 발매했던 티스데일은 일반적인 NBA 선수들과 달리 재즈가 주 전공이었다.

이 가운데 무려 6장의 앨범이 빌보드 차드 재즈 부문 10위 이내에 들 정도로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평을 받았다. NBA뿐만 아니라 수많은 재즈 팬들이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 것만 봐도 티스데일의 음악적 재능과 열정을 알 수 있다.

댈러스 매버릭스의 괴짜 구단주, 마크 큐반은 마치 비디오게임 하듯 NBA 팀을 경영하고 있다. 1990년대 말 당시, 사업수단으로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인터넷 TV 『브로드캐스트 닷컴을』 한 포털 사이트에 팔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던 그는 주식 투자로 다시 한 번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둬들였다.

이후 큐반이 삼은 부업(?)은 NBA 팀 경영. 어린 시절부터 열렬히 응원했던 매버릭스 구단을 고가에 매입한 큐반은 적극적인 투자로 만년하위권에 머물던 댈러스를 2000년대 최고의 팀으로 이끌고 있다.

선수들 역시 연봉을 비롯해 구단 시설, 보너스 등에 전혀 인색하지 않은 댈러스 행을 선호한다는 전언. 종종 구설수에 오르긴 하지만 큐반의 농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만큼은 30개 팀 구단주 가운데 최고가 아닐까 싶다.

사업 확장, 능사는 아니다

사업 확장이나 점포 경영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건 절대 아니다. 1990년대, 시카고 불스에서 6차례 챔피언에 올랐던 스카티 피펜은 무리하게 비행기 사업을 벌이다 그 후유증으로 2009년,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피펜은 돈을 벌기 위해 지난 2007년, 초 42살의 나이에 NBA 복귀를 선언했지만 그를 부르는 구단은 아무도 없었다. 거액의 돈을 받는 대가로 핀란드 리그에 두 경기 출전한 그의 위신은 이미 땅에 떨어진 뒤였다. 카림 압둘-자바 역시 선수생활 은퇴 이후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대다 통장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 큰 위기를 맞은 바 있다.

불우한 환경 속에 농구선수의 꿈을 키운 NBA 선수들은 프로에 입성한 이후 예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큰돈을 만지게 된다. 하지만 관리 부실로 재산을 날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도중, 파산 신청서를 제출, 큰 충격을 안겼던 앤트완 워커는 선수 시절 약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하지만 지나친 명품 수집과 도박 증세로 이내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1990년대 말 불스에서 활약하며 세 차례 우승반지를 거머쥔 랜디 브라운 역시 큰 씀씀이로 수많은 빚을 떠안았다. 브라운은 부채를 갚기 위해 불스에서 받았던 세 개의 우승반지를 경매 사이트에 내놓기도 했다.

도박 혹은 자동차, 시계 같은 고가 수집품에 미치거나 사생활이 문란하지만 않다면 현역 시절에 벌어들인 돈으로 은퇴 이후에도 충분히 풍족한 삶을 보낼 수 있다. 성격에 맞지 않는 사업 확장이나 경영자 위치를 노리기보다 자산 관리에 힘쓰는 편이 더 현명할 것이라는 충고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사진] 마이클 조던 ⓒ Gettyimage

조현일 해설위원 sports@spotv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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