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내막을 보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감독은 당초 기존 유격수 자원들을 경쟁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해당 포지션의 선수들이 코칭스태프의 눈높이에 따라오지 못했다. 기대를 모았던 심우준(24)도 마찬가지였다. 매년 큰 기대를 받는 심우준이지만, 스프링캠프에서는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결국 이 감독은 숨겼던 ‘유격수 황재균’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심우준은 섭섭하지 않다고 말한다. 자신이 못했다고 인정한다. 심우준은 “캠프 때 수비에서 문제가 있었다. 내가 코칭스태프에 믿음을 주지 못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인정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그랬더니 기회가 왔다. 코너 내야수로 낙점했던 오태곤이 타격 슬럼프에 빠졌다. kt는 황재균을 일단 다시 3루로 보내고, 심우준을 유격수로 다시 투입했다.
그런 심우준은 11일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키움과 경기에서 맹활약했다. 선발 9번 유격수로 나선 심우준은 이날 2루타 2개를 포함, 4타수 3안타 맹타를 휘둘렀다. 공격뿐만이 아니었다. 수비에서도 4회 장영석의 3·유간 타구를 기가 막히게 처리하는 등 안정감을 뽐냈다. 선발 라울 알칸타라나 3타점을 뽑아낸 황재균 버금가는 팀 공헌도였다.
심우준은 “타석에서 많이 쫓겼다. 오늘은 여유를 가지려 했다. 파울 라인 바깥으로 나가면서 잡히는 타구가 많았는데, 오늘은 타구를 안으로 집어넣었다는 것이 좋았다”고 웃었다. 수비 상황도 “따라가면서 타구 속도가 빠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느렸다”면서 끝까지 쫓아간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최근 중점을 두는 것은 역시 수비다. 유격수로 자리를 잡으려면 수비력을 보여줘야 한다. 다행히 최근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심우준은 “감독님과 수석코치님이 이닝을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믿어주셨다. 감독님께서 ‘실수를 해도 상관없다. 고개를 숙이지 말고 당당하게 하라’고 조언해주셨다”면서 코칭스태프에 공을 돌렸다.
더 독하게 할 생각이다. 심우준은 “지난 3년은 실책을 하면 미안해서 글러브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투수에게 사과도 한다.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절박함도 있다. 심우준은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이번 기회를 못 잡으면 군대에 가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심우준은 “죽을 듯이 했다. 아직은 내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면서 채찍질을 마다하지 않는다.
오태곤의 부진으로 황재균 유격수 포메이션은 잠시 보류 상태다. 그러나 심우준이 11일과 같은 활약을 꾸준히 이어간다면, 굳이 황재균의 포지션을 바꾸는 모험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심우준은 발도 빨라 이강철 감독의 야구에 이상적으로 부합하는 선수다. 심우준의 부진은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게 했다. 이 카드를 다시 집어넣게 하는 것도 심우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