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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올림픽 정신③ - '원조 체조 요정' 코마네치를 기억하세요?

작성일: 2016.08.03 06:56 조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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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나디아 코마네치 ⓒ GettyImages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다. 그리스인들이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경기였던 올림픽은 종교·예술·군사훈련 등이 삼위일체를 이룬 헬레니즘 문화의 하나였다. 근대 올림픽은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텡 남작의 노력으로 시작됐다. 1896년 올림픽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 1회 대회가 열렸고 어느덧 제 31회 대회인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전 세계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은 수많은 일이 일어났고 대회를 빛낸 스포츠 영웅들이 탄생했다. 올림픽 역사에 선명히 기억될 사건과 인물은 다큐멘터리와 영화, 음악, 공연으로 다시 탄생했다. 스포티비뉴스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앞두고 영화화된 올림픽 일화와 인물을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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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디아 포스터

[스포티비뉴스=조영준 기자] 세세한 기술 요소와 예술성을 모두 고려해 점수를 매기는 대표적인 하계 종목은 체조, 동계 종목은 피겨스케이팅이 있다. 아무리 공정하게 심사를 해도 심판의 주관적인 견해가 들어가기에 초기 기계체조에서는 '완벽'을 정의하기 어려웠다.

나디아 코마네치(55, 루마니아)는 이런 한계를 극복해 낸 대표적인 체조 선수다. 기계체조의 개념을 바꾼 그는 '체조 요정'이란 타이틀을 달고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동유럽 사회주의 엘리트 체육이 완성한 대표적인 선수였던 그는 만 14살의 나이에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단평행봉에서 10점 만점을 받으며 기계체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어린 나이에 큰 업적을 쌓은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1984년 TV 영화로 제작된 '나디아'는 6살 소녀 코마네치가 체조를 시작해 1979년 미국 텍사스주 포스워스에서 열린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여정을 그렸다. 코마네치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그를 키워 낸 벨라 카롤리 코치다. 영화 나디아는 코마네치와 카롤리 코치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또한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인 만큼 서구 세계의 자유 분방한 삶을 갈구하는 코마네치의 정신을 담아냈다.

 코마네치의 실제 삶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14살에 올림픽 챔피언이 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한 뒤 성공을 위해 힘든 길을 걸어왔다.

▲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마루운동을 하고 있는 나디아 코마네치 ⓒ GettyImages

10점 만점의 신화는 이렇게 완성됐다

코마네치는 1961년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인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루마니아는 당시 지역 곳곳에 체조학교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유독 남들의 눈에 잘 띄었던 코마네치는 6살 때 벨라 카롤리 코치를 만났고 체조에 입문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엘리트 체육 교육을 받고 성장한 상당수 선수는 "나는 어린 시절 훈련이 아닌 아동 학대를 받았다"고 회고한다. 옛 동독에서 스포츠 영재 교육을 받고 성장한 피겨스케이팅의 카타리나 비트(51, 독일)가 그랬고 코마네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겨우 6살 소녀인 코마네치는 하루 8시간 동안 훈련에 매달린다. 식사는 엄격하게 제한됐고 자유 시간도 없었다. 호기심 많은 어린 소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체조밖에 없었다. 그는 11살이었던 1972년 사회주의국가연합주니어기계체조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3개를 땄다. 이때부터 주목을 받은 코마네치는 1975년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 개인종합에서 우승한다.

루마니아 시골 출신의 소녀는 체조를 시작한 지 9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 후보로 급성장한다. 루마니아는 체조 강국인 옛 소련과 각종 국제 대회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루마니아보다 선수층이 탄탄했던 옛 소련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코마네치를 가장 경계한다.

1976년 7월, 몬트리올의 체조경기장에서는 기적이 일어난다. 당시 기계체조에서 10점 만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루마니아에서 온 153cm의 작은 소녀가 2단평행봉 위에서 나비처럼 날았다. 코마네치는 자신만이 할 수 있었던 '코마네치 내리기'로 깨끗하게 착지했다. 관중들의 갈채가 쏟아졌는데 전광판에 나타난 점수는 1.00점이었다. 전광판도 코마네치의 점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할 만큼 높은 점수였다. 심판진은 1점이 아닌 10점 만점이 나왔다고 발표했고 코마네치는 기계체조를 넘어 세계 스포츠의 역사를 바꿨다.

▲ 나디아 코마네치(왼쪽)와 남편 버트 코너 ⓒ GettyImages

성공 뒤 찾아온 불행, 자유를 찾아 나선 체조 요정의 몸부림

코마네치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개인종합 우승을 비롯해 3관왕에 올랐다. 올림픽이 끝난 뒤 카롤리 코치와 결별한 그는 슬럼프에 빠진다. 어린 나이에 세계 정상에 올라선 그는 새로운 동기부여를 찾지 못했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음식에 대한 갈증을 이겨 내지 못하며 폭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슬럼프에 빠진 코마네치는 10점 만점 경기를 펼쳤던 그 기량을 완전히 상실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카롤리 코치와 재회하면서 '제 2의 전성기'를 열어 간다. 1978년 세계기계체조선수권대회 평균대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1979년 미국 텍사스 포스워스에서 열린 세계기게체조선수권대회에서 루마니아가 단체전 우승을 하는 데 힘을 보탠다. 그리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평균대, 마루운동)을 목에 건다.

코마네치는 체조 선수로 모든 것을 이뤄 냈지만 이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당시 루마니아는 차우세스쿠 독재 정권 하에 탄압을 받고 있었다. 세계 체조 역사를 갈아 치운 코마네치도 다른 루마니아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먹고살 문제로 고민했다. 코마네치는 망명의 길을 선택했고 1989년 11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코마네치가 루마니아를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차우세스쿠의 장남인 니쿠 차우세스쿠의 정부(情婦)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코마네치는 이 루머에 대해 아직까지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그가 생각한 '자유의 나라' 미국은 기대처럼 낙원이 아니었다. 체조 외에 아무것도 몰랐던 코마네치는 돈벌이 대상이 됐다. 코마네치는 생계를 위해 행사장 이곳저곳을 돌며 체조 시범을 보였다. 자본주의 세계의 놀음에 철저하게 이용당한 코마네치는 다시 실의에 빠진다. 그러나 체조 선수 출신인 버트 코너와 결혼하며 비로소 행복을 찾았다.

코마네치는 체조 지도자는 물론 유니셰프 친선 대사를 비롯한 각종 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나디아 코마네치(오른쪽)와 루마니아 최고 여자 인기 스포츠 스타인 테니스 선수 시모나 할렙 ⓒ GettyImages

코마네치의 후예들, 올림픽의 꽃이 되다

코마네치가 여자 기계체조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기계체조 여자 종합은 올림픽의 '꽃'이 됐다. 코마네치 이후 1984년 LA 올림픽 여자 개인종합 금메달리스트인 메리 루 레튼도 큰 인기를 얻었고 엘레나 슈슈노바(러시아,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인종합 금메달)와 이리아 포드코파예바(우크라이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개인종합 금메달) 칼리 패터슨(미국,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인종합 금메달) 나스티아 리우킨(미국,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인종합 금메달) 등 체조 요정이 잇따라 등장했다.

그동안 체조계는 백인 소녀들이 점령했다. 흑인인 가비 더글러스(20, 미국)는 이러한 벽을 깨고 2012년 런던 올림픽 개인종합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기계체조 개인종합의 유력한 우승 후보도 흑인 소녀 시몬 바일스(19, 미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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