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티비스타=이은지 기자] 영화 ‘박열’은 일본 제국을 뒤흔든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신념적 동지이자 연인 후미코의 이야기를 그렸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라는 사건과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지닌 이미지가 있지만, 이준익 감독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대신 박열과 후미코의 감정을 따라갔다. 박열이 후미코이고, 후미코가 곧 박열 인 듯, 자연스럽게 감정을 주고 받고, 그 감정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무엇보다 감정에 집중했다. 시대적 상황과 환경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했고, 이들의 감정은 후미코가 쓴 자서전을 통해 확인했다. 그 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감정은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배우들과 확고한 신념으로 메가폰을 잡은 이준익 감독을 통해 재탄생 됐다.
이준익 감독과 만났다. 화려한 볼거리를 배제하고, 영화적인 재미를 과감하게 버렸다. 한 순간에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아닌, 뚝배기가 달아 오르듯 천천히 끓어 올라, 빨리 식지 않은 감정을 만들어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 이하 이준익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Q. 생각한지 20년만에 나온 작품으로 알고 있다.
맞다. 20년 전에 영화 ‘아나키스트’를 준비하면서 박열을 알게 됐다. 당시에는 이런 새로운 관점으로 일제강점기를 관객들에게 보여줄 준비가 스스로도 안 돼 있었다. 모자란 실력으로 함량 미달의 민망한 영화를 만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Q. 그 후 ‘동주’가 먼저 나왔다.
누구나 아는, 보고 싶어하는 윤동주를 먼저 영화로 만들고, 호감을 보이면 ‘박열’을 만들려고 했다. 하하. 비호감은 아니더라. 괜찮은 자식이 나왔고, 생소하지만, 또 이런 류의 영화를 내보내면 걱정이 덜 될 것 같았다.

Q. ‘동주’에 이어 ‘박열’을 연이어 했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이야기나 목적, 의도 같은 게 있나.
‘동주’와 ‘박열’은 이란성 쌍둥이 같은 작품이다. 닮은 듯 다른 것을 선택했다. 두 작품 모두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확정 시키는 것이다. 반일감정의 분노를 반복적으로 표출하고 만든 것은 감정적 대응이다.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상대도 똑 같은 반응을 만들게 된다.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논리적인 주장을 하면 일본에서도 그런 리액션을 줄 수밖에 없다. 이성적으로 답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다.
Q. 영화가 전체적으로 자극적이지 않고 무던하다. 진한 여운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루하게 느낄수도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 영화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이 작품은 관점이 이동이 필요하다. 무대가 100% 동경이고, 일본 사람이 보면 일본 영화에 한국 사람이 나오는 느낌일 것이다. 모든 관객을 100% 몰입 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지향점과 영화를 보는 관점을 빗겨선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박열’이라는 영화가 지닌 태생적 한계라고 생각한다.
Q. 그 태생적 한계라고 함은 무엇을 의미하나.
애초에 스펙터클한 장면을 찍을 계획이 없었다는 것이다. 제작비가 많지도 않다. 그 제작비로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에 대한 조건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영화에 몰입해서 본 관객이라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기존 일제강점기 영화의 프레임에서 벗어난다. 그것이 관점의 확대다. 확장된 관점으로 영화를 보면 후미코는 일본 여성인데, 이 일본 여성이 박열보다 더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생소하다.
Q. 오히려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았다는 의미였다.
의도했다. 동경 전체가 폐허가 될 정도의 대지진이었다. 화려한 볼거리에 현혹되는 것을 다 배제한 것이다. 6천여명을 학살한 자경단의 모습도 정보 전달 정도만 했다. 자극을 주기 위한 상업적인 요소는 다 뺐다. 박열과 후미코가 그 시대와 부딪히는, 신념의 본질만 영화로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 길을 정해놓고 출발한 작품이다.

Q. 영화 제목은 ‘박열’인데 후미코가 훨씬 입체적이고, 감정이입이 되는 느낌이다.
박열이 후미코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이유다. 드라마 전개 자체가 박열에서 후미고, 박열에서 후미코다. 순서가 바뀌지 않는다. 박열의 감정 뒤에 후미코의 신이 배치돼 있다. 신이 반대로 됐드면 후미코가 이상한 여자처럼 보인다. 몰입을 위한 신 배치였고, 영화에 몰입한 관객들에게는 이런 물리적인 장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