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트(가운데)를 축하하는 베컴(왼쪽)과 욘센

[스포티비뉴스=유현태 기자] 축구의 지상 목표는 승리라고 하지만, 우리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조금 더 복잡한 것 같다.

참 이상한 축구 경기다. 바이에른 뮌헨의 선발 명단엔 슈테판 에펜베르크, 제 호베르투, 이비차 올리치까지 11번이 3명이나 있다. 그것뿐이 아니다. 벤치에 앉은 영국 최고의 명장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전반 1분 만에 교체 카드를 활용한다. 앤디 콜이 나가고 '슈퍼 서브'의 대명사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들어간다. 역시 교체 투입되는 게 적성에 맞는 것일까. 솔샤르는 투입 3분 여가 지난 시점 첫 골을 넣는다. 

후반전 중반 오른발 프리킥이 날카롭기로 유명한 데이비드 베컴이 직접 프리킥을 처리한다. 프리킥 앞에 벽을 섰던 이는 얼굴로 공이 날아오자 손을 얼른 들어 가린다. 손에 맞았지만 판정은 코너킥. 하지만 직접 킥을 처리한 베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경기에 팬은 환호한다. 선수의 몸짓 하나에 웃고 감동한다. 벤치에 앉아있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얼굴도 흥겹다. 분명히 축구 경기지만 승리가 중요한 한판은 아니기 때문이다.

▲ 1분 만에 교체되는 감독 솔샤르와 살찐 요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바이에른 뮌헨은 26일 밤 11시(한국 시간) 영국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 트레블 20주년 기념 경기'를 열었다. 20년 전 벌어진 이른바 '캄프누의 기적'을 기념하는 자리다. 맨유는 1998-9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정규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바이에른에 0-1로 끌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교체로 투입된 테디 셰링엄, 그리고 솔샤르의 연속 골로 맨유는 극적인 역전 우승을 만들었다.

20년 전처럼 데이비드 베컴, 드와이트 요크, 앤디 콜, 야프 스탐, 데니스 어윈, 니키 버트 등이 맨유의 유니폼을 입고 다시 올드 트래포드에 섰다. 라이언 긱스 대신 폴 스콜스가 피치에 선발로 나섰다. 뇌출혈로 쓰러졌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도 밝은 얼굴로 올드 트래포드의 벤치에 앉았다. 바이에른 쪽에서도 로타어 마테우스, 로이 마카이, 슈테판 에펜베르크 등 구단의 한 페이지를 쓴 스타들을 모아 맞상대를 했다.

전설의 선수들이라지만 이제 외형상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을 정도다. 마테우스의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콜은 배가 나와 유니폼이 꼭 끼었다. 꽃미남 축구 선수의 대명사 베컴의 얼굴에도 깊은 주름이 패었다. 스콜스도 덩치가 커졌다. 피치를 열심히 달리지만 몸짓은 느리기만 하고, 잔디 위를 빠르게 스치던 공들도 어느새 받기 좋게 느릿한 속도로 선수들 사이를 오간다.

▲ 1998-99시즌 챔피언스리그 파이널, 셰링엄의 득점

그래도 이들이 '전설의 선수'라는 증거가 가끔씩 나타난다. 전반 3분 만에 베컴의 발에선 화끈한 오른발 롱패스가 나온다. 뒤이어 스콜스의 중거리 패스를 받아 택배 크로스도 올린다. 수비수 야프 스탐은 후반 20분 바이에른의 전설 3명을 동시에 피치에 눕히며 팬의 환호를 끌어낸다. 뛰어난 기술만큼 '욱'하는 성질이 있었던 스콜스도 올리치나 마르틴 데미첼리스에게 깊은 태클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다투기보단 서로를 격려하고 사과하며 경기를 마무리한다. 경기를 뛰는 이들도, 지켜보는 이들도 긴장감 대신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축구의 지상목표는 승리다. 모든 선수들은 우승을 간절한 꿈이라고 꼽는다. 그래서 우승의 기쁨을 위해 며칠, 몇 달, 몇 년의 긴 시간을 쏟기도 한다. 하지만 그 승리의 그림자엔 아파하는 패배자가 있다. 맨유의 팬들이 20년 전을 '캄프누의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뮌헨의 시민들은 같은 일을 '캄프누의 비극'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었다.

두 위대한 클럽의 전설들이 모인 경기는 그래서 특별했다. 20년 전을 '추억'하는 경기에 바이에른의 선수들 역시 참가했다. 20년 만의 리턴매치에서도 홈 경기를 치른 맨유가 5-0 대승을 거두고, 바이에른은 5골 차 패배를 했지만 더 이상 올드 트래포드의 기적이라고도 비극이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이제는 승패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승자와 패자가 됐던 두 팀은 경기를 마친 뒤 나란히 '위너스'라는 팻말 뒤에 섰다. 바이에른 선수들은 기꺼이 멋진 패자가 됐다. 

▲ 전설들의 경기 마무리는 훈훈했다.

공을 가지고 22명이 뛰는 축구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스포츠다. 평범한 사람의 스포츠인만큼 이번 레전드 매치의 수익도 평범한 이들을 위해 쓰인다. 이번 경기로 얻은 수익금은 모두 맨유 사회공헌재단을 통해 지역사회 청년들에게 사용될 예정이다. 이제 은퇴한 경기를 위해 올드트래포드에 모인 팬들은 약 6만 1000여 명이다.

축구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승리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쁨도, 슬픔도 하나의 장면이 되고, 그때 힘을 쏟아 맞대결을 펼치던 시간들 자체가 추억이 되곤 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팬의 마음 역시 그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하며 박수를 보내는 것일 터. 

그리고 이 '레전드 매치'는 20년 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 팀의 역사를 전달하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마커스 래시포드와 제시 린가드가 양복을 차려입고 경기장을 찾아 '선배님'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그렇게 팀의 역사는 쌓여간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

▲ 방송국 'BT스포츠'의 마이크를 들고 있는 래시포드(왼쪽)와 린가드. 두 선수 모두 유소년 팀 출신이다.

스포티비뉴스=유현태 기자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