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킴 올라주원의 1992년 여름은 뜨거웠다.
▲ 하킴 올라주원의 1992년 여름은 뜨거웠다.

[스포티비뉴스=박대현 기자] 케빈 듀란트(33, 브루클린 네츠)는 올여름 FA 시장 개장을 앞두고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아직 표류 중이다. 브루클린은 계약 기간이 4년이나 남은 에이스 요청에 피닉스, 마이애미, 보스턴 등과 접촉했지만 결론을 맺지 못했다.

브루클린의 까다로운 조건이 발목을 잡는 분위기다. 아드리안 워즈나로스키, 마크 스테인 등 유명 기자에 따르면 브루클린은 듀란트 반대급부로 올스타급 선수에 1라운드 지명권 5장 안팎을 원한다.

이 탓에 듀란트 잔류를 예상하는 목소리가 강하다.

스타플레이어 이적 요구는 드문 일이 아니다. 요청이 관철되지 않은 사례도 부지기수다.

미국 CBS스포츠는 4일(한국 시간) 트레이드 요청 불발사(史)를 다뤘다. 카림 압둘자바(75)부터 고 코비 브라이언트(1978~2020)까지 당대 최고 스타가 총출연했다.

▲ 카림 압둘자바(맨 오른쪽)가 뉴욕에서 뛴다면 어땠을까.
▲ 카림 압둘자바(맨 오른쪽)가 뉴욕에서 뛴다면 어땠을까.

1981년 7월 압둘자바는 LA 레이커스에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여러 이유가 맞물린 것으로 보인다. 

구단은 직전 시즌 부상으로 37경기 출장에 그친 매직 존슨에게 25년 초장기 계약을 선물했다. 연봉도 100만 달러에 육박했다. 기간은 지금도 파격적이고 금액 역시 당시로선 획기적이었다.

메이저리그(MLB) 최초 100만 달러 연봉 수령자가 놀란 라이언이다. 그 해가 1981년이었다(실수령 기준). 이때만 해도 미국프로농구(NBA) 시장성은 MLB와 견주기엔 미흡했다.

매직-래리 버드 맞수 구도가 본격화된 1980년대 중반께 부터야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다. 그럼에도 레이커스는 매직에게 천문학적인 돈과 파격적인 계약 기간을 제시했다.

팀 내 역학구도가 데뷔 12년차 압둘자바보다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은 매직에게 쏠려 있음이 방증된 여름이었다.  

실제 프런트 움직임도 압둘자바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1981년 플레이오프(PO) 1라운드에서 레이커스는 휴스턴 로키츠에 고개를 떨궜다. 시리즈 스코어 1-2로 탈락했다.

압둘자바는 휴스턴 주전 빅맨 모제스 말론에게 판정패했다. 말론은 3경기 평균 31.3점 17.7리바운드 1.7블록슛 야투율 72%를 챙겼다. 승리기여도(WS)도 3.5로 두 팀 통틀어 가장 높았다.

레이커스가 시즌 종료 뒤 말론 영입에 나섰다는 언론 보도가 줄을 이었다. 6시즌간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한 '센터 압둘자바'로선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CBS스포츠는 "하와이로 휴가를 떠나기 전 압둘자바는 제리 버스 구단주에게 말했다. 뉴욕 닉스나 뉴저지 네츠에서 뛰고 싶단 바람을 전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트레이드는 이뤄지지 않았다. 압둘자바 역시 입장을 선회했다. "LA에서 더는 우승이 불가능하다 여겼다면 고향인 뉴욕에서 뛰고 싶었다"면서도 "허나 지금은 아니다. 동료들과 차기 시즌 다시 한 번 파이널 우승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잔류를 천명했다.

'흑표범' 하킴 올라주원(59)도 로키츠(Rockets)가 적히지 않은 유니폼을 입을 뻔했다. 작은 오해가 불쏘시개로 작용했다.

올라주원은 1991-92시즌 말미에 한 달 가까이 결장했다. 구단은 꾀병 가능성을 거론했다. 출전이 가능하다는 팀 닥터 소견에도 올라주원이 햄스트링 부상을 가장하고 태업한다며 쏘아붙였다. 

선수는 격분했다. 그 해 여름 트레이드를 공식 요청했다. 변호사를 고용해 휴스턴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까지 준비했다.

차기 시즌 개막전은 일본에서 열렸다. 올라주원은 일본행 비행기에서 자신이 겁쟁이라 조롱한 찰리 토마스 구단주와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눴다. CBS스포츠 표현에 따르면 그것은 생산적인 대화(a productive conversation)였다. 둘은 14시간 동안 문답하며 오해와 앙금을 풀었다.

시애틀 슈퍼소닉스행을 추진하던 올라주원은 뜻을 접었다. 그리고 맞은 1992-93시즌. 올라주원은 커리어 하이 기록을 남겼다. 

82경기 전 경기 선발로 나서 평균 26.1점 13리바운드 4.2블록슛을 쓸어 담았다. MVP 투표 2위에 이름을 올렸고 1993년 3월에는 휴스턴과 4년 연장 계약을 맺었다. 올라주원은 그렇게 위기를 딛고 2001년까지 텍사스주에서 17년 동행을 이어 갔다. 

▲ 시카고 불스 시절 스코티 피펜(앞줄 맨 오른쪽)은 기량에 비해 턱없이 낮은 연봉으로 유명했다.
▲ 시카고 불스 시절 스코티 피펜(앞줄 맨 오른쪽)은 기량에 비해 턱없이 낮은 연봉으로 유명했다.

스코티 피펜(56) 역시 시카고 불스와 불화로 유명하다. 마이클 조던 복귀 3년째인 1997년 제리 클라우스 단장에게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그 해 11월 시카고 트리뷴과 인터뷰에서 피펜은 "구단에 진지하게 이적을 요청했다. 클라우스 단장은 날 존중하지 않는다"며 불씨를 지폈다. 

시카고 트리뷴 자매사인 WGN방송에서도 "더는 그곳에서 플레이하지 않을 것"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공개 발언 전에도 시카고는 이미 두 차례나 피펜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1994년 숀 켐프, 1997년에는 신인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를 얻기 위한 매물로 피펜을 테이블에 올렸다. 

피펜은 이듬해 1월이 돼서야 복귀했다. 소속은 여전히 불스였다. 기량은 한결같았다. 44경기 평균 19.1점 5.2리바운드 5.8어시스트 1.8스틸 1블록슛을 챙겼다. 

지극히 '피펜다운 기록'으로 정규 시즌을 마감하고 그 해 PO에선 두 번째 파이널 3연패를 완성했다.

봉합은 어려웠다. 피펜은 시즌 종료 뒤 휴스턴으로 이적, 찰스 바클리-올라주원과 명예의 전당 트리오를 구축해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세 선수 간 불협화음으로 트리오는 한 시즌 만에 결렬됐다.

CBS스포츠는 이밖에도 코비와 페자 스토야코비치, 폴 피어스, 대니 매닝 등의 요구 불발 스토리를 거론했다. 

매체는 "(역사적으로) 트레이드 요청은 상당히 흔한 일이며 스타플레이어만의 영역도 아니었다"면서 "듀란트가 과연 압둘자바, 올라주원, 피펜, 코비, 피어스처럼 (트레이드 요구 불발 뒤) 우승을 차지할 수 있을까. 이번 여름 스캔들이 파이널 승자로 가는 이야기 일부분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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