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용산, 정형근 박대현 기자] 출범 39주년을 맞은 K리그에서 MVP는 그간 '공격수의 땅'이었다. 

지난 시즌까지 최우수선수를 차지한 39명 가운데 포워드만 17명이다. 미드필더로 분류된 MVP도 명단을 보면 공격수에 가깝다. 윙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 미드필더 등 공격 가담률이 높은 미드필더 14명이 '최고의 별' 영예를 차지했다. 공격수의 MVP 비율이 79.5%에 달한다.

2020년은 달랐다. '수비형 미드필더' 손준호(29, 산둥 타이산)가 MVP에 선정됐다. 허리에서 공수를 조율하는 수비형 미드필더는 공격수와 견줘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포지션이다. 손준호의 공격포인트도 MVP급은 아니었다. 2골 5도움으로 평범했다.

그럼에도 손준호가 최고의 별이 된 데에는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크게 일조했다는 게 여러 축구계 인사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웨어러블 EPTS(Electronic Performance Tracking System, 전자 장비를 통한 선수 활동량 측정 시스템) 기업 '핏투게더'의 후원을 받아 15개 구단, 10경기 이상 출장 선수를 분석한 정량 데이터를 공개했다. 

이 해 활동량 1위가 손준호였다. 경기당 평균 11.09km를 뛰어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한석종(수원 삼성·10.81km)과 여름(인천·10.78km)을 멀찍이 따돌렸다.

GPS 센서를 부착한 장비를 통해 활동량을 정밀히 측정하고 고도화된 영상 분석이 가능해짐으로써 손준호처럼 궂은일을 도맡는 선수들 활약상이 '수치'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시즌 센터백 홍정호(32, 전북 현대)의 MVP 등극도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웨어러블 디바이스 바람 중심에 축구과학기업 '핏투게더'가 있다. 2017년에 창립한 핏투게더는 선수 몸에 부착해 운동 데이터를 수집하는 웨어러블 기기 '오코치'를 제공하는 풋볼 사이언스 스타트업이다.
 
2020년 1월 까다롭기로 소문난 국제축구연맹(FIFA) 품질 인증을 획득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선정한 '2020 우수 스포츠 기업'에도 이름을 올렸다. 

호주 북아일랜드가 주름잡던 웨어러블 전자 퍼포먼스 트래킹 시스템(EPTS) 시장의 신흥 강자다. 설립 4년 만에 전 세계 380개 구단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핏투게더 윤진성 대표는 최근 박주영(37, 울산 현대)의 재기 가능성을 언급해 눈길을 모았다. "베테랑 나이에 들어섰지만 '공격수 박주영'의 경쟁력은 여전히 낮지 않다. 데이터 분석 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 박주영 ⓒ한국프로축구연맹
▲ 박주영 ⓒ한국프로축구연맹

박주영은 2015년 친정 팀 FC서울 유니폼을 입고 국내로 복귀했다. 8년간의 해외 생활을 마무리하고 K리그에 재입성했다.

복귀 첫 5시즌간 맹활약했다. 리그 146경기 38골 11도움으로 펄펄 날았다. 정점은 2019년 시즌. 35경기에 나서 10골 7도움을 쓸어 담았다. 직전 시즌 11위에 그친 소속 팀을 3위에 안착시키며 명가 부활 키 맨으로 약동했다.

그러나 최근 2시즌은 이름값에 못 미쳤다. 급기야 지난 시즌 17경기 무득점 무도움을 기록했다. 프리미어리그 적응에 애먹은 아스날 시절(2013-14시즌) 이후 단일 시즌 공격포인트 '0'은 처음이었다. 박주영은 나상호, 조영욱, 지동원, 알렉산다르 팔로셰비치와 경쟁에서 밀렸다. 이 탓에 현역 은퇴설까지 제기됐다.  

윤 대표는 "지난 3년간 박주영 훈련 데이터를 쭉 분석했다. 가장 좋았던 2019년과 부진했던 지난해 퍼포먼스 데이터를 비교해보니 (유의미한) 큰 차이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나이가 아닌) 데이터를 살피면 경기 소화 능력이나 피지컬 면에서 박주영의 기량이 큰 폭으로 감소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감독이 바뀌면서 팀 전술에 변화가 있었던 점, 이에 따른 활용법 문제가 선수 부진에 영향을 미쳤을 확률이 높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예컨대 전반 0분부터 10, 20, 30, 40분마다 박주영이 뛴 거리를 산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수 활동량이 얼마나 감소하는질 분석했다. 박주영의 경우 분당 감소세에서 2019년과 2021년이 큰 차이가 없었다. 최고 속도와 (최고 속도에) 도달하는 시간, 스프린트 속도도 마찬가지다. 스프린트 횟수는 조금 떨어졌으나 민첩성 지표에선 오히려 K리그 평균보다 높았다. 젊은 공격수와 견줘도 전혀 경쟁력이 뒤처지지 않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핏투게더는 박주영의 신체 능력과 플레이스타일, 주요 동선 등을 담은 스카우팅 리포트를 제작해 울산에 건넸다. 반향이 적지 않았다. 

리포트 자료 하나로 구단이 영입 결정을 내린 건 아니지만 '한국에도 이처럼 깊이 있는 데이터 분석서를 만드는 곳이 있구나' '정보를 활용한 새로운 생태계가 축구판에서도 구축될 수 있겠구나' 같은 반응이 곳곳에서 일었다. 박주영이 에이전트 없이 울산 유니폼을 입게 된 여러 배경 가운데 하나다.

현재 울산 외에도 복수 구단이 연봉 협상 자료로 삼기 위해 선수 관련 정보를 핏투게더에 의뢰한 상태다. 

박주영은 지난달 26일 성남FC를 상대로 울산 데뷔전을 치렀다. 합격점을 받았다. 최전방 공격수로서 동료와 연계하고 성남 수비진을 분산시키는 움직임이 돋보였다.

좌우에 바코와 엄원상, 아래에 위치한 아마노와 호흡이 빛났다. 홍명보 울산 감독도 "박주영 장점은 수비 뒤 공간을 파고드는 것인데 조금씩 적응하는 느낌이다. 컨디션 문제는 전혀 없다"며 만족스런 반응을 보였다. 

▲ 박주영(오른쪽)이 '울산 데뷔전' 소감을 말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 박주영(오른쪽)이 '울산 데뷔전' 소감을 말하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핏투게더가 몰고 온 데이터 혁신 바람은 스토브 리그에도 새 물결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세계적인 미드필더 케빈 더브라위너(30, 맨체스터 시티)는 소속 팀과 주급 40만 파운드 거액에 2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보다 흥미로운 건 더브라위너가 에이전트 없이 직접 재계약 협상에 나선 점이었다. 중재자 역할을 맡는 에이전트 없이 선수가 직접 구단과 재계약을 논의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더브라위너는 에이전트 대신 데이터 분석가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데이터 전문가가 만든 자료를 연봉 인상 근거로 내밀었다.

현재 기량에 따른 자신의 팀 내 영향력과 향후에도 성공적인 폼을 유지할 확률이 높음을 데이터로 제시했다.

윤 대표는 "앞으로 데이터는 감독의 선수 활용 지표를 넘어 연봉 협상 테이블에서도 중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이 같은 조류가 영국에서 태동했고 그 대표적인 예가 더브라위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핏투게더의 도움을 받아 에이전트 없이 올겨울 울산으로 이적한 박주영 사례가 화제를 모았다.

"더브라위너는 빅데이터 분석관을 직접 고용해 에이전트 없이 최고 연봉으로 계약을 맺었다. 이 흐름이 앞으로 굉장히 빠르게 자리잡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국내에선 핏투게더가 박주영을 통해 첫걸음을 시도했다. 데이터 활용을 통한 '다이렉트 계약'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SPOTV NEW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