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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올림픽 출전사 ⑰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의 첫발을 떼다

작성일: 2016.07.22 09:48 신명철 편집국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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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천 서울시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1980년 10월 8일,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겠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한체육회


[스포티비뉴스=신명철 편집국장] 세계 10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한국 스포츠가 1980년대에 올린 최고의 성과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다. 유치 운동의 태동에서 최종 결정까지 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서울 올림픽 유치는 우리나라 스포츠 외교사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를 통틀어 세계를 상대로 펼친 외교사 가운데 으뜸가는 성과이다. 1979년 올림픽 유치를 결심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이어진 전두환의 신군부 출현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치적 혼란 속에 대두된 서울 올림픽 유치 문제는 국가적으로 ‘뜨거운 감자’에 틀림없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결단으로 올림픽 유치의 불씨를 살리고 기적적으로 유치에 성공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막강한 힘을 가졌던 박종규 대한사격연맹 회장(청와대 경호실장)은 1978년 9월 24일부터 10월 5일까지 태릉국제사격장에서 태권도를 제외한, 한국 스포츠 사상 첫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인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동서 냉전의 국제적인 정세로 말미암아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이 불참하긴 했어도 68개국에서 1,5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성공적으로 대회를 치른 데 자신감을 얻은 박종규는 대회 기간을 앞뒤로 내한한 국제 스포츠계 거물급 인사들로부터 ‘앞으로 한국은 올림픽도 개최할 수 있는 저력을 가졌다’는 찬사를 듣고 고무돼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림픽 유치 구상을 밝히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뒤로하고 1979년 2월 제 25대 대한체육회 회장에 취임한 박종규는 취임과 동시에 올림픽 유치의 꿈을 실현하고자 대사 출신의 조상호, 김세원을 부회장으로 영입해 스포츠 외교 진용을 구축하는 한편 김예식, 이원웅, 이태근 등 기획과 외국어에 능통한 전문 위원들을 스카우트해 실무 추진팀을 가동했다. 박종규는 체육회 내의 진용을 이 같이 정비한 뒤 첫 포석으로 1979년 6월 24일부터 30일까지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에서 열린 ANOC(국가올림픽위원회 총연합회) 창립 총회와 대륙별 NOC(국가올림픽위원회) 총회,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집행위원회에 대규모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해 올림픽 유치를 위한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대한체육회는 1979년 3월 주무 부서인 문교부에 유치 건의서를 제출했고 문교부는 주 일본 대사관을 내세워 1964년 도쿄 올림픽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등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 문교부는 뒤이어 1979년 8월 3일 제 24회 하계 올림픽 유치 문제를 국민체육심의위원회에 상정했고 심의위원회는 신현확 경제기획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7인 소위원회를 구성해 1979년 8월 22일 첫 대책 회의를 가졌다. 7인 소위원회는 올림픽 개최는 국민 총화와 대 공산권 교류 및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에서 우위 확보를 위해 바람직스럽다는 결론을 내리고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도 올림픽 전초 대회로 유치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19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특별시 시장은 박종규 대한체육회 회장, 김택수 IOC 위원, 정주영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박충훈 무역협회 회장이 배석한 가운데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외 기자회견을 열고 1988년 제 24회 하계 올림픽을 한국의 수도 서울에 유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서울시가 올림픽 유치 계획을 발표한 지 18일 뒤인 1979년 10월 26일 제 4공화국의 종말을 고한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이 터져 그동안 올림픽 유치 운동을 주도해 온 박종규도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 대한체육회장직을 사퇴해 올림픽 유치 운동은 오리무중이 됐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정국의 혼미 속에 올림픽 유치 도시인 서울시는 물론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도 올림픽 유치에 대한 회의론에 휘말렸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의 정부 또한 올림픽 유치에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다.

국내의 모든 상황이 이 같이 어수선한 가운데 1980년 7월 14일 조상호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박종규의 뒤를 이어 회장에 취임했고 서울시장도 박영수로 바뀌어 올림픽 유치와 관련된 주요 인사들이 재편성됐다. 뒤따라 정치적인 상황도 바뀌어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해 올림픽 유치 계획은 새 국면에 접어든다.

대한체육회는 IOC의 올림픽 유치 신청서 마감일이 1980년 11월 30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체육회의 올림픽 유치 의사를 재조정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29일 첫 회의를 가졌으나 아무런 결론을 못 내려 KOC(대한올림픽위원회) 확대 상임위원회에서 재론하기로  했다. KOC는 11월 6일 긴급 확대 상임위원회를 열어 서울 올림픽 유치의 타당성을 재확인하고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IOC에 제출하도록 문교부에 건의했으며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KOC의 결정에 동의했다. 그러나 KOC와 문교부의 이 같은 방침에도 유치 도시인 서울시는 모든 여건으로 볼 때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는 불가능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고 문교부는 이를 종합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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