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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포수의 전설 이만수, 그의 선수 시절은 어땠을까(4·끝)

작성일: 2018.07.29 09:00 신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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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수는 포수로서 한국 야구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한희재 기자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예상대로 삼성 라이온즈는 홍문종에게 첫 타석부터 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홍문종은 5차례나 볼넷으로 출루했다.

이튿날 열린 마지막 경기에서도 홍문종은 4차례 볼넷으로 걸어 나가 '9연속 타석 고의4구'라는 달갑지 않은 진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모든 이들이 짐작하듯 이만수를 타격 3관왕으로 만들기 위한 삼성 사령탑의 결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규 시즌이 끝났고 9월 30일 한국시리즈가 시작됐다. 이때 이미 프로 야구 취재기자들 마음은 최동원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투표 시점이 유두열의 극적인 역전 결승 홈런이 나온 한국시리즈 마지막 7차전이 끝난 직후였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이에 앞서 당시 프로 야구 취재기자들은 이미 이만수를 MVP에서 배제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만수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이만수는 전기 리그 모든 경기(50)에 출전했다. 당시에는 팀당 시즌 100경기를 치렀다. 프로 원년인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OB에 4패1무1승으로 밀린 삼성은 1983년에는 시즌 초반부터 서영무 감독과 재일 동포 이충남 조감독의 불화설로 삐걱거리더니 해태 타이거즈와 MBC 청룡에 전·후기 리그 1위를 내주고 종합 4위에 그치는 등 호화 멤버를 거느린 팀에 걸맞지 않은 성적에 허덕였다.

1984년 시즌 한국시리즈에 나기 위해 전기 리그 1위는 삼성에 떨어진 지상 과제였다. 주전 포수인 이만수는 몸이 부서져라 뛰었다. 몸이 다소 불편해도 참고 마스크를 써야 했다. 목표했던 전기 리그 우승을 차지한 삼성은 후기 리그에서 여유가 생겼다. 이만수도 그랬다. 

이만수가 시즌 들어 처음 결장한 건 8월 26일 서울 MBC전에서였다. 과로에 열병이 겹쳤다. 게다가 눈병까지 겹쳤고 28~30일 대전에서 열린 OB전에 결장했다. 이후 눈병으로 보름 정도 고생했다.

사령탑의 지시로 출전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 이만수는 그해 11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이만수로서는 최선을 다한 시즌이었지만 투표 결과는 시즌 MVP 최동원, 한국시리즈 MVP 유두열로 나타났다. 

투표가 있기 전 분위기가 최동원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걸 안 이만수는 당시 한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럴 줄 알았다면 우겨서라도 출전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소속 팀이나 이만수에게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1984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1985년 삼성도 이만수도 특별한 경험을 한다. 국내 구단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구단 스프링캠프에서 전지훈련을 한 것이다. 이 전지훈련의 효과를 본 삼성은 그해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유일한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에는 다저스 구단 코치들이 방한해 마산에서 치른 삼성의 겨울 훈련을 도왔다.

그런데 1985년에도 삼성은 황당한 상황을 겪게 된다. 장효조와 김시진이 워낙 좋은 성적을 올려 홈런 공동 1위인 이만수로서는 크게 억울할 일이 아니지만 해태 타이거즈 김성한에게 시즌 MVP를 내주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제일모직 공장 입구에 있던 삼성 구단 사무실에서 투표 결과를 전해 들은 장효조나 장효조를 취재하기 위해 대구에 내려간 글쓴이나 허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 초·중반 이만수의 실력을 증명한 일이 1985년 이후 3년 연속 연봉 25% 인상이었다. 당시에는 선수들 연봉을 상한선 25%로 묶어 놓고 있었는데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이만수에게 삼성 구단은 성적에 관계없이 3년 연속 연봉 인상 상한선을 보장했다. 뒤에 다 알려졌지만 일단은 비밀리에. 구단의 이 결정은  일부 선수, 정확히 말하면 일부 선수 아내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만수는 경기력뿐만 아니라 철저한 자기 관리와 성실한 선수 생활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33살 때인 1991년 시즌 마지막으로 3할대 타율(378타수 120안타, 0.317)을 기록했고 36살 때인 1994년 마지막으로 두 자릿수(12개) 홈런을 기록했다. 프로 유니폼을 입었지만 이때만 해도 서른이 넘으면 퇴물 취급을 했다. 이만수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을 채우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 시절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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