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비뉴스=도쿄(일본), 김민경 기자] "일본은 정말 선발진이 풍부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4명이 있다. 일본은 이런 투수들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따로 있나?"
구리야마 히데키 일본 야구대표팀 감독이 16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리는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8강 토너먼트 이탈리아와 경기를 앞두고 기자회견에서 들은 질문이다. 질문한 기자는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MLB.com의 마이클 클레어였다.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만 모여있다는 메이저리그에서 매일 다양한 투수들의 공을 지켜본 그의 눈에도 일본 마운드는 꽤 인상적인 듯했다.
클레어는 1라운드 조별리그 B조 경기가 열린 지난 9일부터 줄곧 도쿄돔으로 출근해 대회에 나선 모든 팀을 취재하고 질문을 던졌다. 물론 우승 후보인 일본을 취재하는 비중이 가장 높긴 했다. 그런 그가 일본 대표팀의 야구를 2주 가까이 지켜보다 던진 마지막 질문이 바로 '일본은 이렇게 좋은 투수들을 키울 수 있는 시스템을 어떻게 갖췄느냐'였다. 지난 10일 일본과 1라운드 조별리그 경기에서 4-13으로 참패했던 한국도 궁금해할 만한 질문이었다.
일본은 조별리그 4경기와 8강전을 치른 17일 현재 팀 평균자책점 1.80으로 참가국 가운데 1위에 올라 있다. 오타니 쇼헤이(29, 에인절스)-다르빗슈 유(37, 샌디에이고)-사사키 로키(22, 지바롯데)-야마모토 요시노부(25, 오릭스)까지 선발 로테이션이 탄탄했다. 오타니가 2승, 나머지 3명이 1승씩 책임지며 5전 전승 4강 진출을 이뤄냈다.
선발투수 4명만 봐도 화려하다. 오타니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유일무이한 '투타 겸업' 스타로, 이탈리아와 8강전에서는 최고 164㎞에 이르는 강속구를 뿌리며 눈길을 끌었다. 다르빗슈는 메이저리그 통산 95승을 자랑하는 베테랑이고, 사사키는 시속 160㎞를 웃도는 강속구를 우습게 던지는 신예다. 야마모토는 지난해까지 2년 연속 투수 4관왕(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과 사와무라상을 차지한 리그 최정상급 에이스다.
일본 투수진은 이들을 포함해 모두 15명이다. 평균 나이는 25.9세에 불과하다. 1980년대생은 다르빗슈가 유일하고, 30대도 다르빗슈와 이마나가 쇼타(30, 요코하마) 단 둘뿐이다. 투수 조 막내는 올해 21살인 다카하시 히로토(주니치)인데, 막내도 2경기에 등판해 2이닝 1피안타(1피홈런) 무볼넷 3탈삼진 1실점으로 선방했다.
8강전 선발투수 오타니가 이탈리아의 반격에 4-2로 쫓긴 5회초 2사 1, 3루 위기에 등판한 구원투수는 이토 히로미(26, 닛폰햄)였다. 이토는 삼진으로 깔끔하게 이닝을 끝냈고, 오타니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특해했다. 잘 알려진 일본프로야구(NPB) 타이틀홀더 투수를 제외하고도 일본 불펜에는 젊고 유망한 투수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클레어는 구리야마 감독에게 "선발진이 정말 풍부하다. 믿을 수 없는 선발투수가 넷이나 있고, 야마모토는 2차례나 사와무라상을 받은 투수인데도 4선발로 나섰다. 이런 토너먼트에서는 이런 탄탄한 마운드가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일본 야구에는 이런 투수를 키우는 특별한 계획과 시스템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구리야마 감독은 잠시 대답을 망설이며 미소를 짓다 "감독으로서 좋은 투수들이 많은 건 정말 영광이다. 선발투수들뿐만 아니라 2번째 선발투수(텐덤)로 나선 투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말 훌륭하다. 대부분이 메이저리그 수준의 투구를 펼칠 수 있는 선수들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고 답했다.
이어 "내가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으로 지낼 때는 탄탄한 투수진을 꾸리는 게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일본 야구를 설명을 하자면, 일본 야구는 배우려는 경향이 기본적으로 있다. 그리고 기본을 중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라고 덧붙였다.
구리야마 감독은 설명을 이어 가다 한번 더 기본기를 강조했다. 그는 "일본에서 야구를 배울 때 나는 기본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나도 설명하기 어려운 일본만의 방식이 있다. 때로는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고 개개인의 개성을 살려주려 한다. 심지어 나도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조금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투수의 기본은 결국 스트라이크를 던질 줄 아는 데서 시작한다. 지난해 10월 두산 베어스 마무리캠프에 투수 인스트럭터로 함께한 구보 야스오 전 소프트뱅크 투수코치도 구리야마 감독과 결이 비슷한 말을 했다. 구보 전 코치는 두산의 젊은 투수들에게 "역시 투수들은 스트라이크를 많이 던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수는 제구가 돼야 상황이 만들어진다. 무서워하지 말고 자꾸 스트라이크를 던지라고 선수들의 머릿속에 강력하게 입력하고 있다. 볼넷을 던지면 다음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이번 대회에서 5경기를 치르면서 볼넷을 단 5개밖에 내주지 않았다. 한국은 4경기에서 11개를 기록했는데, 일본전에서 무려 8개가 쏟아져 나왔다. 일본을 반드시 잡아야 탈락을 면한다는 중압감이 어린 투수들의 제구 난조로 나타났다. 좌완 영건 김윤식(23, LG)과 이의리(21, KIA)가 각각 0이닝 볼넷 2개, ⅓이닝 볼넷 3개로 고전한 게 컸다. 이날 볼넷을 주지 않은 투수들의 제구가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나머지 투수들은 볼카운트가 몰려 스트라이크존에 넣으려는 투구를 하다 안타를 내줬다. 8이닝 동안 일본 타선에 13피안타 8볼넷 13실점으로 고전한 배경이다.
제구 문제는 투수가 무조건 3타자 이상을 상대해야 한다는 규정에도 큰 영향을 줬다. 한국은 3타자를 다 상대하기도 전에 제구가 흔들리는 투수가 자주 등장했다. 평소면 흔들리자마자 다음 투수가 나왔겠지만, 이강철 한국 감독은 흔들리는 투수가 볼넷을 주거나 안타를 내주면서 3타자를 다 상대할 때까지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낯선 제도에 적응도 대응도 하지 못한 이 감독은 결국 투수 교체 타이밍을 전혀 잡지 못하고 무너졌다.
'시속 150㎞는 기본, 160㎞는 넘어야 강속구',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다양한 변화구 구사력' 등은 이번 대회에서 일본 투수진 앞에 붙은 대표적인 수식어다. 그래도 가장 큰 일본 투수진의 강점은 정교한 제구력이었다. 제구력은 결국 큰 무대에서도 떨지 않고, 자기 공을 믿고 스트라이크를 넣을 줄 아는 강심장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감독을 비롯해 이번 대회 한국 마운드의 문제를 진단한 야구인들은 "어린 투수들이 큰 무대에서 긴장하거나 컨디션이 올라오지 않아서 자기 공을 던지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이런저런 수식어를 떼면 한국 마운드에는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투수 자체가 부족했다. 일본 마운드와 격차를 어느 때보다 크게 실감한 한국 투수진은 기본에 충실한 답을 찾아 다음 국제대회에서는 달라진 성적을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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